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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과 책임의식은 주민자치 실질화의 또 다른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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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과 책임의식은 주민자치 실질화의 또 다른 이름
  • 이관춘 연세대학교 객원교수
  • 승인 2023.03.06 10: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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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춘의 마을·자치·교육

아빠가 손님을 두고 왔어!”

 

2017년에 개봉한 영화 <택시운전사>의 주인공, 만섭이 홀로 집에서 자신을 애타게 기다리는 어린 딸에게 전화로 한 말이다. 19805월의 광주. 그때를 기억하는 일은 단지 과거의 사건을 돌이켜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당시 그 자리에 있지 않아 심리적 거리를 느끼고 있는 사람이라 해도 자유롭기 힘들다. 천만 관객을 돌파했다는 영화 택시운전사는 시간에 파묻혀 가라앉았던 이런 복합적인 감정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다.

만섭은 서울에서 하나 뿐인 딸을 키우며 성실하게 살아가는 택시운전사다. 군사독재정권이지만 그래도 정부가 하는 말은 진실일 거라고 믿고 살아온 전형적인 소시민이다. 빠듯한 벌이에 먹고 살기 급급하다보니 정의니 민주니 하는 말은 세상물정 모르는 말일 뿐이다.

사글세가 밀려 집주인 아줌마의 잔소리를 듣고 살던 어느 날, 광주까지 갔다 오려는 외국인손님을 태우는 횡재를 만난다. 밀린 사글세를 단번에 갚을 절호의 찬스였다. 문제는, 손님인 독일 외신기자를 태우고 천신만고 끝에 광주에 도착한 만섭은 나라를 지켜야 할 군인들이 국민들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하는 것을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게 된 것.

두려움과 공포에다 집에 홀로 있을 딸 걱정에 서울로 탈출하려던 만섭은 심경에 변화를 일으켜 딸에게 전화를 건다. 그리고 택시를 되돌려 광주로 향한다. 최소한 손님을 두고 와서는 안 된다는 책임감 때문이다. 그것이 택시기사의 책임이라 생각한 것이다.

 

어린왕자가 말하는 책임의 의미

어제도 그러했듯 오늘도 사람들은 직장과 일터에서 자신이 운전하는 직무의 택시에 손님을 태운다. 책임감 있는 사람들은 혹여 두고 온 손님이 없는지를 살피고 확인한다. 목적지까지 손님을 안전하게 모시는 것이 자신의 책임이며, 그 책임을 수행했을 때 보람은 물론 삶의 주인으로서의 긍지를 갖게 된다.

어른들도 즐겨 읽는 동화책으로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가 있다. 책 제목에서 풍기는 뉘앙스처럼 동화의 감수성이 잔잔히 배어있는 어린이를 위한 가벼운 책 같지만 막상 내용을 곰곰이 씹어볼수록 결코 가볍지 않음을 알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놓치고 있는 것은, 이 책이 어린왕자로 체현된(embodied) 어른들 속의 내면의 아이(inner child)’를 만나는, 어른을 위한 삶의 철학 소설이라는 점이다. 우리 각자의 내면에 있는 본래적 자아의 속삭임이자 명령인 것이다.

프랑스의 작가이면서 공군 비행사인 생텍쥐페리가 칠흑 같이 컴컴한 밤하늘을 비행하면서 절감한 삶의 철학이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휴머니즘에 기초한 책임의 철학이다. 인간으로서의 책임과 의무감이 상실될 때 어떤 참극이 발생하는지를 처절하게 체험한 삶의 철학이다.

어린왕자의 철학은 세대를 거쳐 오면서 지금까지 80여 년 간 여전히 전 세계적인 현상이 되고 있다. 그 이유는 지금의 우크라이나 전쟁과 같이 빈발(頻發)하는 국가 간의 전쟁들, 세월호의 상흔이 채 아물기도 전에 발생한 10.29 참사 같은 크고 작은 재앙들이 국내외적으로 변함없이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린왕자가 탄생한 다음 해, 철학자 아도르노가 계몽의 변증법에서 절규한 그 새로운 종류의 야만 상태가 국내외적으로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야만상태의 직접적인 원인이 바로 생텍쥐페리가 역설하는 인간애에 기초한 책임이다. 책임이란 말은 일상에서 너무도 무감각해져 있어 어린왕자의 말대로 그건 너무나 잊혀져 있는 행동(act)”이다. 여우의 입을 빌어 어린왕자는 말한다.

 

넌 네가 길들인 것에 대해 언제나 책임이 있어. 넌 네가 길들인 장미한테 책임이 있어.”

 

어린왕자가 묻는다. “길들인다는 게 무슨 의미지?” 여우가 답을 한다. “그건 너무나 잊혀져 있는 거지. 그건 관계(ties)를 맺는다는 의미야.”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너는 나에게 세상에서 유일한 존재가 될 것이며 나는 너한테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된다.

우리가 특정한 직무를 맡아 일하고 있다는 것은 그 직무에 관련된 사람들을 길들이는 것이다. 대통령 직무를 맡게 되는 순간 대통령은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이 세상에서 유일한 존재가 된다. 반대로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은 대통령에게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국민들은 대통령이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 줄 것이란 믿음에 길들여져있게 된다.

마찬가지로 환자들은 의사가 자신의 병을 제대로치료해 줄 것이란 믿음에, 언론은 진실을 보도해 줄 것이란 믿음에, 판검사는 정의와 공정을 생명으로 기소하고 판결할 것이란 믿음에 길들여져있게 된다. 길들인 것은 관계를 맺는 것이며,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공동존재(mitsein)인 인간 각자 각자의 피할 수 없는 실존적 운명이다.

 

여우가 질책하는 이태원 참사의 책임

여우와 어린왕자가 사용한 책임이란 단어, responsibility의 의미는 철학적이며 교육적이다. 이 말은 응답하다(response)’‘능력’(ability)의 합성어임을 알 수 있다. 즉 책임이란 ‘~에 응답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어린왕자에 따르면 자신이 길들인 것에 응답하는 능력, 자신과 관계를 맺은사람의 믿음이나 요구에 응답하는 능력이 책임인 것이다.

반대로 응답하지 않거나 응답하는 데 게을리 한 것은 무책임이다. 응답을 잘못한 것도 무책임이지만, 응답을 안 하는 것 역시 무책임이다. 개인 간의 무응답은 사소한 일로 그칠 수가 있다. 허나 대통령을 포함한 행정당국, 공직자나 기업경영인 등 사회지도층이 제대로 응답하지 않을 경우 돌이킬 수 없는 사회적 재난이나 참사를 부를 수가 있다. 이태원 참사, 관재인가 민재인가?를 주제로 한 제11회 주민자치 실질화 대토론회(주민자치, 20231월호)는 책임의 의미와 엄중함, 그리고 주민자치의 역할과 필요성을 재삼 확인시켜주고 있다.

토론회의 참석자들은 이태원 참사를 수많은 젊은 영혼들이 제대로 꽃도 피우지 못한 채 유명을 달리한 비극적인 사고”, “참으로 어이없고 어처구니가 없는 참사”, “대한민국 수도 서울 한복판에서 그렇게 많은 희생자들이 발생한 어처구니없는 후진국형 사고라고 단정했다.

또한 참사의 원인에 공감하였다. 정부의 재난안전시스템이 가동되지 못해 국민의 절박한 구조요청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여기 살려주세요. 여기 이태원 *** 앞이에요. 살려주세요!" 언론(연합뉴스 2022117일자 보도)이 전한 당시의 긴박한 구조요청이다. 이태원 핼러윈 참사 현장에서 살려달라며 119에 도움을 요청한 신고는 첫 신고인 1029일 오후 1015분부터 다음날 056분까지 100건에 이른다. 119 신고 녹취록에는 무응답을 제외한 신고 87건에 시간대별로, 신고자들의 절박한 상황이 생생하게 담겼다. 신고자들은 간절하게 구조를 호소했다. 그러나 정부는 이에 응답하지 못했다.

대통령이 국가안전시스템 점검회의에서 4시간 동안 쳐다 만 보고 있었느냐라고 질책했다는 보도를 보면, 4시간 동안 국가는 없었다’. 국가는 생사의 기로에 놓인 절박한 국민들의 구조요청에 성실히응답하지 않은 책임이 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국민 10명 중 7명 이상이 이태원 참사에 대해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한다는 여론조사 결과(미디어토마토 112)가 나오는 이유다.

국가의 책임이란 말은 막연한 것이 아니라 헌법에 명시된 것이다. 따라서 이태원 참사와 관련해 형사나 민사책임에만 관점을 맞추게 되면 국가책임에 대한 본질이 흐려진다. 정문호 전 소방청장은 헌법 제34조 제6항의 국가는 재해를 예방하고 그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는 규정과, 경찰관 직무집행법 제5조 등을 제시하며 이태원 참사는 가파르고 비좁은 골목에 엄청난 인파가 몰렸음에도 안전사고에 대비한 현장관리 및 통제가 전혀 이뤄지지 않아 대규모 인명피해로 이어진관재(官災)임이 명백하다고 밝혔다.

 

주민자치와 주민의 책임의식

주민 혹은 시민은 왜 정치권력에 복종하는가? 누군가 이 질문을 토마스 홉스(1588~1679)에게 한다면 그의 대답은 명확하다. 바로 자기보존에 필요한 안전(security) 때문이다. 그는 리바이어던에서 인간은 태생적으로 자유와 타인에 대한 지배를 좋아하지만 국가 안에 살면서 스스로를 구속하게 되는 궁극적 원인은 바로 자기보존과 그를 통한 더 만족스러운 삶에 대한 기대를 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이 별다른 거부감 없이 국가의 정치권력이나 정치질서에 복종하는 이유는 인간의 합리성[이기심]’에 기초한 자기보존 혹은 안전 때문이라는 것이다.

홉스가 말한, 국가를 인정함으로써 개인이 얻는 더 만족스러운 삶에 대한 기대를 존 로크는 재산의 보호, 장 자크 루소는 자유와 평등을 지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국가와 정치권력의 제1의 의무이며 가장 기초적인 존립 목적은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태원 참사대토론회를 보면서 고전적인 사회계약론에까지 생각이 미치게 되는 것은 정부 및 정치권력의 책임의식의 실종이란 현실 때문이다. 어느 언론인은 안전관리를 총괄·조정해야 할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변명으로 일관하는 장관에 대해 대통령 앞에서는 어떻게 말하는지 몰라도 국민 앞에선 가장 싸가지 없이 말하는 장관”(동아일보 202318일자 김순덕의 도발’)이라고 비판의 날을 세웠다. 또한 그는 최근에 발간된 저서 한국의 새 길을 찾다의 내용을 인용하며 정치는 흉물이 됐고, 관료는 잘못된 정치에 굴종해 권력을 누리기만 하며 책임은 지지 않는 풍토가 만연해 있다고 질타했다.

홉스의 말대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절대적인 정치권력을 구성하고 복종하는 이유가 무엇보다 자기보존과 안전에 있다면, 국민의 안전이 국가권력에 의해 보장되지 않을 경우 국민의 안전권을 보장하기 위한 대안적 논의가 필요한 것은 당연하다. 그 논의의 일환으로 주민자치의 실질화가 더욱 시급하다는 의견들은 주민자치의 본뜻을 생각해볼 때 당연한 주장이다.

책임감은 주인의식에서 나온다. 자신이 주인이란 것을 인식하고 행동할 때 책임감이 높아진다. 주인의식이 있는 직원은 열정이 있으며 열정의 핵심에는 심리적 주인의식이 자리하고 있어 책임의식이 강할 수밖에 없다. 반대로 영혼이 없는 공무원에게서 책임감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주인의식의 또 다른 이름은 자치(自治). “자기의 일을 자기 스스로 다스리는 것이야말로 주인의식이며 책임의식을 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민자치의 실질화는 말이 아닌 실질적으로 주민이 주인으로서 책임을 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태원 참사 토론회에서 이태원 참사는 정확히 이태원1126반에서 발생했다는 전상직 한국주민자치중앙회 대표회장의 말은 송곳처럼 핵심을 파고든다. 참사가 난 지역이 가파르고 비좁은 골목이며 안전사고에 노출되어 있어 현장관리나 통제가 필요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가장 잘 아는 주민들이 누구인지를 말해주기 때문이다. 전 회장은 이어 그런데 주민 어느 누구도 동네를 지킬 책임도 없지만 권리도 없다. 손발이 묶여 있는 것이라고 주민자치의 현실을 지적했다.

채진원 교수 역시 해당 지역의 실정을 잘 알고 있는사람이 주민이기에 주민과 주민자치회는 각종 재난과 재해의 위험요인을 완화하고 대응할 수 있는 다양한 자원과 능력을 보유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현실적으로도, 지역적으로 발생하는 현안에 대해 즉각적으로 대응하기에는 중앙조직은 너무 거대하고 위계 서열적이기에 주민과 주민자치회 주도의 재난 대응과 회복력 확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주민이 중심이 되고 주민에 의해 가동되는 주민자치를 통해 지역 사회의 안전망을 구축할 수 있다는 현실은 실질적인 주민자치의 시급함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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