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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지는 죽음을 통달하고 있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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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지는 죽음을 통달하고 있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
  • 윤성은 영화평론가
  • 승인 2023.05.22 10: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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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사람들 그리고 영화
Town in Movie

많은 영화의 배경이 마을이다. 영화 주인공들의 삶의 터전 역시 그들이 사는 마을이고 동네이기 때문이다. 스크린 속 인물들은 배경이 되는 마을, 그리고 이웃들과 때로 갈등하고 협력하며 여러 이야기들을 만들어나간다. 그 이야기의 결말은 해피엔딩이 되기도 하고 비극으로 치닫기도 한다. 앞으로 마을, 사람들 그리고 영화에서는 마을과 사람들의 케미스트리, 그들 사이의 교감과 성장, 변화를 다룬 작품들을 소개한다. 그 속에서 주민자치의 바람직한 방향, 때로 반면교사의 깨달음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편집자 주]

 

* 영화의 내용이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카야 클라크.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그녀를 마시 걸’(Marsh Girl, 습지 소녀)이라고 부른다. 카야의 집이 습지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녀는 분명 마을 안에 살고 있지만 아무런 관심도 돌봄도 받지 못하고 살아가는 외톨이다. 그녀에 대해 이상한 소문을 퍼뜨리고 적대적인 시선을 숨기지 않는 마을 사람들 때문에 카야는 죄지은 것도 없는데 숨죽여 살아가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에서 체이스라는 청년의 시체가 발견된다. 사인은 전망대에서의 추락사로 밝혀졌고 타인의 지문이나 발자국은 없었지만 보안관은 현장에서 발견된 작은 털실 하나 때문에 타살의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다.

 

작은 마을서 일어난 의문의 죽음

작은 마을에 이런 소문이 퍼지자 사람들은 카야를 의심한다. ‘딱 봐도 미친 여자 같다. 누구 하나 죽일 것처럼’ ‘진화가 덜 된 사람이다’ ‘체이스가 습지를 들락거렸다등 술집에서 오가는 대화 속에 카야에 대한 정확한 정보나 그녀가 체이스를 죽였을 만한 논리적 단서는 없다. 그러나 보안관은 소문을 좇아 그녀의 집을 탐문하고 현장의 털실이 나온 모자를 발견한다. 그녀는 곧바로 구금되어 재판에 회부된다. 마을 사람들은 누군가는 죽이고 싶었을체이스의 죽음이 사고사보다는 마치 누군가의 범행이기를, 그 범인은 카야이기를 바라는 것만 같다.

델리아 오언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가재가 노래하는 곳’(Where the Crawdads Sing, 감독 올리비아 뉴먼. 2022)은 감옥에 갇힌 카야가 자신의 삶을 회고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카야의 어머니와 형제들은 그녀가 어렸을 때 폭력적인 아버지를 견디다 못해 도망쳤고 곧이어 아버지마저 그녀를 혼자 버려둔 채 마을을 떠나버렸다. 그 때부터 카야는 성인이 된 지금까지 자급자족하면서 집과 습지를 지킨다. 학교에 다녀보려고도 했지만 첫 날부터 그녀를 냄새나는 습지 쥐라고 놀리는 아이들 때문에 카야는 차라리 그녀가 사랑하는 자연에서 배우기로 결심한다.

아름답고 신비로운 생물들로 가득 찬 습지는 카야의 유일한 가족이자 친구요, 교사다. 카야는 그렇게 노스캐롤라이나주 아우터뱅크스 해안 습지의 생물들을 면밀히 관찰하고 그림으로 남기기 시작한다. 이 진귀한 백과사전적 기록물은 후에 카야에게 경제적 풍요로움과 명예까지 가져다주는 중요한 자산이 된다.

 

세상과 분리돼 순수하고 강인한 습지 소녀

영화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도 카야와 습지의 관계다. 영화는 종종 카야와 습지를 동격으로 묘사한다. 개발되거나 오염되지 않고 본연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습지와, 세상과 분리됨으로써 때가 묻지 않은 카야의 순수한 모습은 닮은 데가 많다. 또한, 가냘프게만 보이는 외모와 달리 어릴 때부터 모든 것을 자신의 힘으로 해결해왔던 그녀의 내적 강인함도 겉으로는 고요해 보이나 가공할 생명력을 가진 대자연과 겹쳐진다.

가족들이 모두 습지를 떠날 때 카야가 떠나지 않았던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카야는 문학적 비유로서 습지의 현신이고, 영화적 캐릭터로서 습지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카야의 마지막 내레이션에도 그녀와 습지와의 연관성은 분명히 드러난다.

이제 나는 습지가 되었다. 나는 백로의 깃털이며 물가에서 씻겨 나가는 조개껍데기이자 반딧불이다. 반딧불이 수백 마리가 습지 깊은 곳에서 반짝일 때 나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아무도 없는 저편, 가재가 노래하는 곳에.”

그러므로 카야에 대한 사람들의 홀대와 의심은 바로 습지에 대한 주민들의 태도와 다름없다. 영화의 배경인 아우터뱅크스는 미국 역사에서 만신창이가 되었거나 파산한 사람들이 숨어들었던 곳으로, 소설에서는 낙인이 찍힌 성스러운 땅답게 인간의 비밀을 지켜준땅으로 묘사된다. 그런데 영화 속 주민들은 인간에게 한없이 관대하며 모든 것을 내어준 습지를 쓸모없는 곳으로 여기고, 여기에 동화되어 살고 있는 사람을 미치광이나 살인자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살고 있는 땅에 대한 주민들의 무지와 무관심은 종종 심각한 판단의 실수를 유발한다. 중요한 문화유산들이 개발이라는 명목 하에 한순간에 사라지기도 하고, 오랫동안 잘 보존되어 온 자연을 훼손시키거나 투기 지역으로 전락시키기도 하는 것이다.

 

편견과 차별에 대한 비판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법정드라마, 멜로드라마, 범죄스릴러 등 다양한 장르가 섞여 있는 작품이지만 카야의 입장에서 재판 부분은 의외로 술술 진행되는 듯하다. 다른 마을 사람들과 달리 약자를 돌볼 줄 아는 카야의 변호사는 체이스의 죽음이 사고사였으며 알리바이를 무시한 편견이 카야를 구속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밝혀낸다. 결국 배심원들과 재판부는 카야에게 무죄 판결을 내린다.

편견과 차별에 대한 비판은 카야의 재판 외에도 영화 초반, 카야를 도와주는 식료품점 흑인 부부의 대화에 직접적으로 드러나 있다. 남편이 아내에게 백인들 일에 끼어들면 위험하다면서 조심하라고 말하자 아내는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 하시고라는 마태복음의 한 구절을 인용하며 조심하라고 하지 마라고 대꾸한다. 흑인에 대한 차별이 극심했던 1950-1960년대, 그것도 보수적인 미국 남부지역에서 백인 소녀를 자신들보다 더 불쌍한 존재로 여기고 도와주려는 부부의 모습은 인상적이다.

재판에서 이긴 카야는 전 연인 테이트와 다시 만나 그들을 이어준 습지에서 평생을 함께 한다. 그러나 카야와 두 남자에 대한 진실은 그녀의 변호사도 알지 못하는 이야기로, 카야의 플래시백 속에 등장해 충격적인 반전을 준비해 놓고 있다.

내면의 외로움까지 혼자 해결할 수는 없었던 십대의 카야에게 테이트가 손을 내민다. 어릴 때부터 유일하게 카야에게 친절을 베풀었던 테이트는 카야와 자연스럽게 연인이 되고 둘은 종종 행복한 시간을 갖는다. 그러나 자신의 미래를 위해 대학을 선택한 테이트가 마을과 카야를 떠나버리자 카야는 다시 혼자가 된다.

반드시 돌아온다는 약속까지 저버린 테이트 때문에 카야가 아파하고 있을 때 이번에는 마을에서 소문이 좋지 않은 체이스가 접근해온다. 카야는 체이스를 사랑하지는 않지만 적극적으로 대시하며 결혼까지 하자고 하는 그를 체념하듯 받아준다. 그러나 곧 그에게 진짜 약혼녀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카야는 관계를 정리하려 한다. 체이스가 그런 카야에게 집착하며 폭력적으로 대하는 사이, 공교롭게도 테이트가 다시 마을로 돌아와 카야의 곁을 맴돈다.

 

습지는 죽음을 통달하고 있다

카야에게 테이트와 체이스는 습지와 늪처럼 대비된다. 습지는 생명이지만 늪은 곧 죽음이다. 그리고 영화의 첫 내레이션처럼 습지는 죽음을 통달하고 있다’.

이 문장은 여러 모로 의미심장한데 무엇보다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관객들은 이 문장 하나에 범인이 다 드러나 있었다는 사실에 전율하게 된다. 카야의 일기장에는 습지는 죽음을 통달하고 있다다음에 가끔 먹잇감이 살아남으려면 포식자는 죽어야 한다는 문구도 쓰여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포식자를 제거하는 선택을 하고 자유로워진다. 어떤 경우든 현실에서 살인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그러나 심정적으로 이해 받을 수 있는 살인은 있다. 최소한 영화 속에서는, 분명히 있다.

원작 소설의 작가인 델리아 오언스는 동물행동학 박사로, 아프리카에서 7년 동안 야생동물을 관찰한 논픽션 세 편으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27주 연속으로 아마존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한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놀랍게도 그녀가 일흔 가까운 나이에 발표한 첫 소설이다. 습지 생태계에 대한 전문적 지식은 물론 종종 실화로 오인 받을 만큼 세밀하게 묘사된 사건들과 인물의 감정이 일품이다.

무엇보다 결말부 반전을 통해 그녀는 인간이 삶의 터전을 무시하며 살아갈 때 일어날 수 있는 위험성에 대해 경고하는 듯하다. 영화가 재밌었다면 카야의 외로움에 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소설도 일독을 권한다.

 

사진=소니픽처스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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