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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을 죽이는 커다란 달 '플라워 킬링 문' '화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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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을 죽이는 커다란 달 '플라워 킬링 문' '화란'
  • 운성은 영화평론가
  • 승인 2023.11.17 11: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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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사람들 그리고 영화
Town in Movie

1942년생, 마틴 스콜세이지가 돌아왔다. 그것도 그의 페르소나라 할 수 있는 두 명의 배우가 모두 출연하고 러닝타임은 206분에 이르는 대작으로. ‘플라워 킬링 문’(Killers of the Flower Moon, 2023)은 애플TV+ 오리지널 영화지만 영화는 기본적으로 영화관에서 상영해야 한다는 스콜세이지의 신념과 조건에 따라 개봉관을 잡았다. 2배속도 안되고 정지버튼도 없는 스크린에서 스마트폰까지 내려놓고 206분을 견딘다는 것은 동시대 관객들에게 엄청난 도전이겠지만 그럴 만한 가치가 충분한 작품이다.

 

거장이 끄집어낸 미국 역사의 생경한 장면

이 영화를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1920년대 오클라호마 주의 상황을 먼저 주시할 필요가 있다. 당시 이 지역의 오세이지족은 다른 원주민들과 달리 백인보다 부유했는데, 1870년대에 이주민들의 공격으로 인해 오세이지족이 캔자스 보호구역에서 밀려나 매입한 오클라호마 보호구역에 엄청난 석유가 묻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석유에 대한 채굴권을 갖고 있어서 이 지역에서는 오히려 백인들이 오세이지족에 기생하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당시 오세이지 카운티에 살던 이들이 벌어들인 돈은 19세기 캘리포니아 골드러시 때의 금 수확량을 합친 것보다 많았다고 전해진다.

이곳에서 백인이 오세이지족 만큼 부유해지는 가장 빠른 길은 결혼제도를 통해 그들의 가족이 되는 것이었다. ‘플라워 킬링 문에서 백인들이 원주민에게 물건을 팔려고 굽신거리는 장면이나 백인 남성과 인디언 여성이 팔짱을 끼고 다니는 모습은 정말 생경하다. 그동안 영화는 물론 미디어에서 거의 다루어진 적이 없기 때문인데 미국 사회가 그들의 역사에서 마치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완전히 지워버리고 싶어 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확실한 것은 팔순의 영화감독은 생각이 달랐다는 것이다. 마틴 스콜세이지는 플라워 킬링 문을 통해 미국 역사의 한 페이지가 널리 알려지고 오세이지족들이 조금이나마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기를 바라며 영화를 만들었고 그의 바람은 솔찬히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돈의 논리에 스러진 어느 원주민부족의 비극

영화는 오세이지족들이 유전을 발견하게 된 순간에 이어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어니스트’(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삼촌 윌리엄 헤일’(로버트 드니로)을 만나러 오는 장면을 보여준다. 지역 유지에다 주민들의 신임을 얻고 있는 헤일은 어니스트에게 일자리를 주며 잘 정착하라고 격려한다. 그리고 그는 지역 경제의 핵심인 오세이지족에 대해서도 소개하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가장 훌륭하고 부유하고 아름다운 사람들이라는 그의 말은 진심처럼 들린다.

어니스트가 차츰 이 곳 생활에 적응해 하는 것으로 보이자 헤일은 어니스트에게 오세이지족 순혈통인 몰리’(릴리 글래드스톤)를 소개해주며 사귀어 볼 것을 권유한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어니스트는 진심으로 몰리를 사랑하게 되고 처음에 냉랭했던 몰리도 그에게 마음을 열면서 두 사람은 헤일이 바라던 대로 부부가 된다.

그러나 당시 오세이지족은 여러 힘든 일들을 겪고 있었는데 미국 정부는 20세기 초에 오클라호마가 주로 지정되는 과정에서 오세이지족의 재산 관리를 돕는다는 명분으로 백인 남성들을 후견인으로 설정하는 제도를 도입했다. 후견인은 오세이지족을 대신해 미국 정부에 석유 로열티를 신탁해 예치했고 그것은 오세이지족의 재산을 갈취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플라워 킬링 문에는 몰리가 후견인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두 번 정도 등장한다. 몰리는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정부의 간섭 때문에 집안의 돈도 마음대로 꺼내 쓰지 못하는 오세이지족의 답답함이 충분히 전달된다.

또한 오세이지족은 부족원들의 원인 모를 연쇄적 죽음으로 큰 슬픔에 빠져 있었다. 오세이지족들은 회의를 통해 부족을 위협하는 세력이 있음에 동의하고 중앙 정부의 도움을 받아 사건을 수사하고자 한다. 그 자리에 참석한 헤일은 자신이 오세이지족의 충성스런 친구라는 점을 다시 한 번 분명히 한다. 그러나 사실 그는 오세이지족 죽음의 배후에 있는 장본인이다. 그는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어니스트에게 몰리의 가족이 적으면 적을수록 지분이 더 많아질 거라고 조언한다. 겉으로는 오세이지족의 언어를 하고 그들에게 한없이 친절하고 다정한 척 굴면서 안에서는 살인을 사주하는 헤일의 위선은 역겨움을 넘어 공포스럽다.

영화는 헤일의 이중적 면모나 악행에 대해 극적인 장치를 쓰는 대신 어떤 상황에서도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당당한 그의 뻔뻔스러움을 부각시킨다. 이 분노유발자 캐릭터를 매끈하게 완성시킨 것이 로버트 드니로라는 명배우였음은 두 말 할 필요도 없다. 감독은 스릴러의 서늘함과 장르적 짜릿함보다 하드보일드의 차가움을 선택함으로써 관객들을 섬뜩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영화를 우아하고 기품 있게 세공한 톤 앤 매너이기도 하다.

어니스트는 몰리를 진심으로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헤일의 발자취를 그대로 쫓아가는 인물이다. 처음 오클라호마에 도착했을 때 그의 눈에 처음 들어오는 것은 부자가 될 수 있다는 문구다. 그것은 일꾼들을 구하려는 석유회사 인부들로 번잡한 기차역, 넓은 땅과 좋은 집을 가진 헤일의 모습으로 이어지면서 그의 머릿속에 앞으로의 삶을 인도하는 슬로건처럼 각인된다.

그의 꿈은 오직 돈을 많이 버는 것이고 그 목표 아래에 있는 윤리나 도덕적 양심은 압사 직전에 있다. 아내가 자매들의 죽음 때문에 힘들어하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그녀를 위로하지 못할 뿐 아니라 그녀 가족들의 살인에 암묵적으로 동참한다. 심지어는 몰리가 어릴 때 부족에서 남편으로 맺어주었던 인디언을 죽이라고 적극적으로 사주하기도 한다. 헤일의 악행이 고스란히 대물림되고 있는 것이다.

헤일은 마지막 남은 오세이지족 순혈, ‘몰리까지 없애기 위해 그녀의 당뇨병 치료약(인슐린)에 다른 약물을 타라고 지시한다. 그것이 몰리를 죽음에 이르게 하리라는 것을 알았던 어니스트는 갈등하면서도 삼촌의 말을 거부하지 못한다. FBI의 수사로 재판이 막바지에 이르러서야 그는 헤일의 범행을 낱낱이 까발리고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지만 그것도 순수한 반성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자본 권력과 빈부의 격차, 비극의 시작화란’(和蘭) 대신 화란’(禍亂)

플라워 킬링 문은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한국 영화 한 편을 떠올리게 한다. 톱스타 송중기가 노개런티에 조연까지 자처한 중저예산 상업영화, ‘화란’(Hopeless, 2023. 감독 김창훈)이 그것이다. 보기 드물게 정통 누아르의 문법을 따라간 작품으로, 가상의 도시 명안시와 오세이지 카운티는 상통하는 바가 있다.

명안시에서 나고 자란 십대의 연규’(홍사빈)와 조직의 중간보스인 치건’(송중기)은 각자 다른 길을 걸어왔지만 그토록 증오하는 명안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동질감을 느낀다. 조폭과 정치인들이 결탁해 있는 명안시는 두 사람에게 달갑지 않은 가족과 비슷한 존재다. 끊어내려 발버둥 쳐도 강력한 족쇄로 그들의 발목을 잡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유사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된 두 사람 중 하나가 다른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희생양이 되고 나서야 한 줄기 희망의 빛이 비춘다. 연규의 인생이 꼬이기 시작하는 화근에는 오세이지 카운티 살인사건의 경우처럼 자본 권력과 빈부의 격차가 있다. ‘플라워 킬링 문은 권력을 가진 자들이 부까지 가지기 위해 벌이는 촌극이고, ‘화란은 부와 권력에서 소외되어 있는 자들이 두 가지를 모두 가진 자들을 벗어나려는 비극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영화 초반부, 연규는 서로 비슷비슷하게 사는네덜란드로 이민 가는 것이 꿈이라고 말한다. ‘화란’(和蘭)에 입성하기 위해 그에 앞에 놓여 있는 것은 화란’(禍亂)이다.

플라워 킬링 문이라는 제목은 오세이지 카운티의 5월에 뜨는 커다란 보름달에서 유래했다. 꽃이 만발한 들판에 보름달이 뜰 때 많은 오세이지족들이 살해를 당했다고 해서 붙여진 제목인데 원작소설의 제목이자 영화의 원제인 킬러스 오브 더 플라워 문’(Killers of the Flower Moon)이 더 좋은 제목이라는 평가가 많다.

다만, 원작소설은 오세이지족 살인사건과 FBI의 탄생’(The Osage Murders and the Birth of the FBI)이라는 부제하에 FBI의 전신인 수사국이 이 사건을 해결해가는 과정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 당시 오세이지족의 공포에 이입하기에는 부족하다. 마틴 스콜세이지가 재조명한 플라워 문이 지금 시대에는 차별과 비인간성이라는 사회의 어두움을 소멸시키는 빛이 되기를 바란다.

 

사진=애플TV+/플러스엠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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