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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약·향교의 정신적 가치, 현대 주민자치서 어떻게 되살릴까[연구세미나84-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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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약·향교의 정신적 가치, 현대 주민자치서 어떻게 되살릴까[연구세미나84-①]
  • 김윤미 기자
  • 승인 2023.12.22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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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4회 주민자치 연구세미나 ‘한국 향약․항교와 주민자치’

상부상조하던 아름다운 마을공동체 전통인 향약과 마을 교육의 장이던 향교의 정신을 현대의 주민자치를 통해 되살리는 방안이 모색되어 관심을 끈다. 한국주민자치학회는 21일 서울 인사동 태화빌딩에서 제84회 주민자치 연구세미나를 열고 한국 향약의 역사적 전개와 주민자치’ ‘향교와 서원의 이해라는 주제 발표와 토론을 통해 전통적 가치의 현대적 계승과 발전에 대해 논의했다.

이날 세미나에서는 박경하 한국주민자치학회 부설 향약연구원장(중앙대 명예교수)한국 향약의 역사적 전개와 주민자치, 최영갑 성균관유도회총본부 회장이 향교와 서원의 이해를 발표하고 김택환 경기대 특임교수, 김용재 성신여대 교수 그리고 유승상 서강대 생명문화연구소 연구위원 등이 지정토론자로 나섰다.

행사에 앞서 박경하 교수는 환영사를 통해 조선시대 향약 연구자는 많으나 기층민들의 공동체인 촌계 연구자는 거의 없다. 오늘날 주민자치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촌계는 지금 주민자치보다 더 선진적이고 합리적이며 대표성을 가지고 있었다라며 오늘날의 주민자치, 마을공동체에서 향약, 촌계의 정신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관심을 갖고 있다. 특별히 오늘은 성균관유도회와 함께 자리를 마련했다. 지금 우리는 패륜적 사회, 금수보다 못한 사회에서 살고 있다. 유도회는 지금 우리 사회 공동체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 사회, 윤리, 도덕이 강조되어야 하며 주민자치와 같이 할 일이 많다. 향음주례, 예절교육 등 향교에서 할 수 있는 을이 많다. 지역사회 봉사활동도 같이 하자는 부탁을 드리고 싶다. 오늘 두 단체가 함께 하는 공식적 첫 자리인데 앞으로 계속적으로 협력이 이뤄졌으면 한다고 밝혔다.

최영갑 성균관유도회장도 인사말에서 오늘 세미나에 첫 참석했다. 유도회는 흔히 운동조직으로 착각하시는 분들도 있는데 유림들의 모임이다. 해방이후 성균관이 재건되고 독립운동가 김창숙 선생이 전국 유림들을 모아 유도회 본부를 만들었다. 유도회는 향교 조직과는 좀 다르다. 전국 향교가 임원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면 유도회는 항교 조직 활성화를 위한 회원조직으로 이뤄져 전국 17개 시도에 본부가 있고 300여개 지부가 있다. 오늘 세미나의 취지는 유도회에도 굉장히 중요한 취지이자 의미 있는 주제다. 첫 세미나인 만큼 현 유림의 실태를 명확히 알고 그런 다음에 어떻게 접근하고 결합해 우리 사회를 밝게 만들 수 있을까 하는 차원에서 현황 중심으로 발표를 하고자 한다고 설명했다.

먼저 첫 번째 발제에서 박경하 교수는 한국 향약의 역사적 전개와 주민자치에 대해 발표했다. 그는 조선시대 지방행정 체계를 소개하며 향약과 촌계의 위치를 설명했다.

박경하 교수는 15세기부터 등장한 사림파(士林派)는 고려의 군현 향리 이족(吏族)으로부터 유래한 것으로 여말선초의 사회적 변동과 이에 따른 신분의 재편성 과정에서 사족(士族)과 이족(吏族)으로 나누어졌다. 이들은 같은 토성(土姓)에서 일부는 군공(軍功), 첨설(添設), 산직(散職) 등으로 신분을 상승시켜 품관화(品官化)되고 관인 자원이 15세기 후반부터 크게 증가하자 이족의 사족화의 길이 봉쇄되었다. 16세기 이후부터는 양반과 중인층의 확연한 구분에 따라 이제는 같은 토성이면서 향리와 사족과는 별개의 신분으로 보아 천시하였다. 농민들에 대한 수탈을 자행해 오던 훈구계열과 이들의 하수인인 이족이 사림에 의해 향촌사회에서 세력을 잃어 갔다. 동시에 재지사족은 사족중심의 향촌지배 운영원리로서의 향규를 제정하여 향촌지배질서를 유지하고자 하였다고 향약 등장 배경을 소개했다.

이어 박 교수는 향규는 향안에 오른 향원들간의 약속으로 유향소의 조직 즉 좌수의 선임, 그 소관업무, 향안입록절치, 향선생(鄕憲) 및 그 서무인 향유사의 업무와 호장, 이방 등의 선임에 관한 것을 주 내용으로 한다. 향촌에서는 향규향안을 통해 토성이 아닌 신래사족과 향리들의 향권 참여를 배제하는 동시에 재지사족들의 하층민에 대한 무단행위를 견제하는 등 자율적 규제 속에서 향촌사회를 안정시키고 치향지인(治鄕之人)’으로서의 위치를 지켜 나가고자 하였다. 그러나 임란을 겪으면서 재지사족의 경제적 기반의 붕괴와 그들의 기반이었던 유향소와 향안이 소실된 상황이나 향사당향안의 중수, 향약동계의 실시 등으로 사족 중심의 향촌지배질서를 임란 후에도 꾸준히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하였다고 설명했다.

계속해서 중앙정부의 향약 시행과정에 대해 박 교수는 향약은 선초부터소학성리대전에 실려 조선의 유학자들에게 유입되어 유교의 이념을 전파하는 주 교재였으며 1518년 경상도 관찰사 김안국이 <향약언해>를 출간 보급했다. 특히 중종대 반정으로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등장한 조광조 등의 재지사림파에 의해 유교 이념의 실천운동으로 향약이 시행됐다라며 중국의 남전현에서 여씨형제들이 만든 <여씨향약>은 일향의 일문끼리 약속하여 예를 강구한 것이다. <여씨향약>은 남전현 일향의 사족간의 규약이므로 존비의 구별이 필요치 않았으나 조선사회는 상하귀천의 구별이 엄격함에도 불구하고 운영에 있어 <여씨향약>의 조목만을 따라 나이로 차석을 정함으로 해서 천인이 상좌에 앉게 되어 양반을 능욕하는 등의 폐단이 야기되기도 했다고 짚었다.

박 교수는 또 기묘사화로 실시 2년 만에 향약 보급운동은 중단되었다. 이후 향약은 전국적인 규모는 아니고 단속적으로 뜻있는 수령이나 명망 있는 재지사족에 의해 실시됐다라며 선조대에 이르러 향약 시행 논의는 다시 본격화되었고 그 결과 1573(선조 6) 9월에 다시 국명에 의한 향약 시행을 보게 되었으나 다음해 2월 이이의 선양민 후교화(先養民後敎民)’란 명목 하에 향약태조론(鄕約太早論)’이 주장됨에 따라 향약 시행이 다시 중단됐다. 이처럼 중앙정부의 전국적인 향약 논의와 시행은 중단되었으나 향촌에서는 재지사족들이 수령에 대한 우위를 인정하면서 일정한 자치권을 보장받고 기층민을 지배하는 향규을 제정하여 하층민에 대한 향권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다음으로 박경하 교수는 재지사족의 촌락지배와 동계에 관해서는 일향에서의 사족의 영향력이 축소되는 배경에서 사족은 그들의 동족적·경제적 기반인 촌락에서의 동계의 결성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임란 후의 상하동계(上下洞契)의 시행이 그것이다. 전기에도 동계가 있었으나 그것은 양반들만을 구성원으로 하여 길흉 시 부조하는 성격의 것이나 임란 후의 동계는 전기의 양반들의 동계 즉 상계와 상천들 간에 상호규검(相互規檢) 하던 조직인 향도(鄕徒)와 같은 하계를 합한 상하합계(上下合契)’였다. 이것은 전란으로 인한 막대한 인명손실의 손실로 이웃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살기 어려운 형편 속에서 상천을 회유하여 향촌복구에 함께 참여시킬 필요성에서 나온 것이라고 덧붙였다.

계속해서 그는 임란 후 양반들이 상천을 회유시켜 합력하고자 한다고 해서 반상 간 차별을 완화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상하합계 형태의 동계를 통하여 사족은 기층의 민중조직을 포용 흡수하여 사족적 신분질서를 재강화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전란으로 인한 많은 인명손실로 말미암아 일손을 많이 필요로 하는 농업을 본으로 삼는 공동생활 속에서 나올 수 있는 자연스러운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러므로 상하합계 하는 상황은 전란의 피해에서 뿐 아니라 공동의 노력으로 극복하여 나가야 할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도 강조되었다고 밝혔다.

이어 주민자치의 원형인 촌계의 존재양태에 대해 박 교수는 백운동서원을 창설했던 주세붕은 1546년에 향약을 궁촌벽항(窮村僻巷)에까지 시행하자고 건의하였다. 이때 수렴청정을 하던 명종의 모인 문정왕후는 삼정승을 모아 놓고 향약 대신에 향촌 마을마다 있는 계()를 결성하여 환난상구케 함이 어떻겠느냐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에 영의정 윤인경은 ‘(향약은) 스스로 행하고자 하는 자가 있으면 행하여도 좋지만 조정이 입법하여 시행하는 것은 어렵다고 대답하였다. 이것은 향약을 관주도로 이끌지 말자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명종대부터는 지역에 따라 특징이 다른 향약들이 제정 시행되었다고 짚었다.

발제에 따르면 촌계의 대표적 기능으로는 제사(축제)공동체로서의 기능, 생활공동체의 기능, 그리고 노동공동체의 기능이 있다. 박 교수는 조선후기의 촌계는 사족의 동계와 지방관에 의한 주현향약 등의 하부조직으로 흡수 편입되기도 하였으나 끊임없이 기층민의 입장을 반영하면서 그 독자성을 유지하여 왔다. 또한 19세기 중후반 촌계에서의 두레조직이 지배층의 수탈에 저항한 농민항쟁의 일부세력으로서 참여하기도 하였다. 이는 민의 사회의식의 성장과 아울러 끊임없는 저항을 통해 자치성을 확보해 나가는 면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기층민의 조직인 촌계는 지배층의 지배이념사상과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사족의 동계 등에 흡수되는 등 외형적 형태는 변화되고 있었지만 그 모습이 용해되거나 분해됨이 없이 생활공동체로서의 자생적인 필요를 바탕으로 오랜 전통을 유지하여 왔다고 그 의미를 설명했다.

이와 같은 향약의 전통은 1895년 최초의 주민자치회법이라 할 수 있는 향회조규향약판무규정으로 집대성되는 듯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법제도화는 제대로 시행되기도 전에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정착되지 했다.

그럼에도 박경하 교수는 항회조규의 역사적 의의에 대해 갑오개혁과 을미년의 <향회조규><향약판무규정>이 우연히 등장한 것이 아니다. 조선시대 향촌자치의 유제인 향회 유향소 향약의 전개과정을 통해 주민자치, 민권 향상을 향한 끈질긴 노력과 희생으로 정립된 것을 반영 제도화 된 것이다. 광무년간에 향회제를 폐지하지 않은 것은 면면히 이어 온 향회의 역사성과 기층민의 주민자치 정신을 반영한 것이다. 근대적 측면에서는 한계를 가지지만 일정 부분의 자치권 부여, 주민 참여, 국왕의 법률적 승인 등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평했다.

계속해서 박 교수는 조선총독부 관료와 관학자들의 향약 연구를 소개하고 일제시기 향약의 성격에 관해 “1932년 세계공황기에 산업장려, 농촌진흥, 사상통제 목적으로 향약 장려 및 지원금 지원이 시행됐다. 1937년에 중일전쟁시기 향약정신의 조성조성. 각 도에서는 향약명륜회동계 유신회 등 기존의 향약단체를 제외하고 부인회농촌진흥실행조합식산계애림계청년단권농공제조합진흥회 등 전국에 33625개 단체, 단체원은 1527786명이었다. 조선시대 향약은 사족의 향촌민 통제의 도구로 이용됐지만 상호부조 같은 공공적 성격이 강했다. 일제시기에는 이와 같은 향약의 공공적 성격이 약화되고 사회교화, 농촌민의 일상통제, 국가에 대한 충성 등의 성격으로 변용됐다고 짚었다.

다음으로 발제자는 촌계의 주민자치에의 근대적 계승 사례로 칠곡 관호동계를 소개하기도 했다.

계속해서 향약의 현대적 계승 사례로는 남원 입암향약과 장수 계남면 향약, 강원도 제천 향약, 제주도 서귀포시 성읍1리 마을회 등이 소개됐다.

끝으로 박경하 교수는 전통시대 공동체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도덕적, 의무적 덕목이다. 서구 이론을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 전통시대의 향약에서 오늘의 주민자치에서의 공동체생활 규범과 도덕률을 유추할 수 있다. 촌계 구성의 자발성, 운영의 자율성, 의사결정의 민주성, 공유지 활용 재원 확보의 자립성, 강신례라는 주민총회 결산 등이 그것이다라며 예의, 배려, 소통, 경제적 자립, 복지 등의 협동정신과 규정을 바탕으로 한 전통시대의 상부상조하던 향약공동체의 운영원리는 현대의 마을과 도시 공동체에서의 주민자치에서 재조명하여 정책적 시사점으로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 유교적 전통을 계승하나 실천, 생활화하는 내실이 부족한 향교와, 향약의 자립과 협동정신을 계승하였으나 현재 그 정체성 확보에 부심하고 있는 새마을회가 현대 주민자치의 정신적, 공동체 가치를 재생산하는데 협력하면 전통적 가치의 현대적 계승 및 변용이라는 시너지를 낼 수 있다고 강조하며 발제를 마무리했다.

이어 두 번째 발제에 나선 최영갑 회장은 향교와 서원의 이해를 통해 현 유림의 상황을 소개했다. 최 회장은 향교의 기원부터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설립된 상황, 향교와 서원의 기능 등을 먼저 설명했다.

최 회장은 향교와 서원의 기능은 동일하다. 교육-제향-교화 기능이 있으며 향교는 공자와 사성, 공문십철, 송조육현, 동국18현을 중심으로 제를 드리고, 서원은 국가에 대한 공적이나 학덕이 높은 성현에게 배향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항교와 서원의 교관과 교생, 교과목, 평가과목 등에 대해서도 소개했다. 또 항교와 서원의 차이점에 대해서는 다음의 표로 정리해 설명했다.

최영갑 회장은 향교의 현주소에 대해 고령화로 인한 문제 심각 젊은 인력 부족 대도시 유림 활동 부족 유교에 대한 올바른 인식 부족 유림의 자질 향상 문제 등을 꼽으며 누군가는 이 유교문화를 젊은이들에게 계승해줄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다음으로 현 유교조직의 실정과 문제점을 아래 표의 내용으로 짚었다.

 

그는 특히 인구가 많은 대도시에 인구 대비 향교 수가 심각하게 적은 것도 지적했다.

 

최영갑 회장은 대도시가 인구는 많은데 향교 숫자가 매우 적다. 어떻게 향교를 만들어 젊은이들을 수용할 수 있게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실질적으로 향교는 문화재로 늘어날 수가 없다. 국민들에게 올바른 의식을 어떻게 확산시키고 유교에 대한 기존 인식을 개선해 어떻게 하면 유교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확산시킬 수 있을 것인가가 관건이라고 지적했다.

실제 통계에 따르면, 종교에 대한 설문조사라는 한계가 있지만 유림 인구가 198540만 명에서 30년 만인 20157.6만 명으로 급감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최 회장은 아시아를 통틀어 보아도 유교와 유림이 활동하는 나라는 우리나라 빼고는 드물다. 그러나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장담할 수가 없다. 앞으로 향교의 역할과 기능에 대해 고민하고 빨리 앞장서서 개선하지 않으면 하나의 관광지로만 남을 것이라며 향교의 활동 영역에 대해 각종 인성, 예절교육, 아카데미교육 관례(冠禮)시연, 기로연, 서예반, 경전반 등 운영 시도별 도덕성 회복운동 개최 문화 관광 프로그램 진행 초중고 학생 체험 프로그램 진행 탄소중립 운동, 생명 존중 운동 등 사회참여 등을 꼽았다.

끝으로 최영갑 회장은 향교와 서원은 전통 교육 기관이며 인재를 배출하는 곳이다. 성인(聖人)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았던 유학 이념 전파의 공간이다. 서양식 교육, 서양 종교의 유입으로 전통교육이 쇠퇴하였다. 그로 인해 향교 및 서원의 기능 또한 퇴락하고 말았다. 최근 새로운 교육과 체험, 전통문화의 장으로 탄생하고 있다. 민족의 주체성은 향교와 서원의 활성화를 통해 달성된다. 고령화로 인해 발전이 느리고 현대문명에 둔감하다. 과거의 영광을 되찾아갈 수 있다면 더없는 행복이 될 것이다. 주민자치와 함께 하며 좋은 기능을 되살릴 수 있고 어르신들에게 봉사활동을 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더 없이 환영하실 것이라고 정리했다.

 

사진=문효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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