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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의 예안향립약조(禮安鄕立約條)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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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의 예안향립약조(禮安鄕立約條) (3)
  • 박경하 한국주민자치학회 부설 향약연구원장(중앙대학교 역사학과 명예교수)
  • 승인 2024.01.03 14: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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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의 연재에서 퇴계가 작성한 <예안향립약조>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 보다 일백년이나 앞선 광주향약의 조목과 거의 유사하다는 점에서 새로운 문제가 제기된다.

광주향약의 발상지로 꼽히는 부용정. 사진=문화재청
광주향약의 발상지로 꼽히는 부용정. 사진=문화재청

 

광주향약(1451)과 예안향약(1556), 광주 양과동향약(1604)은 그 조목의 내용이 매우 흡사하다. 양과동향약은 17세기 초반 작성으로 같은 지역의 광주향약의 영향을 받아 중수되었으니 조목이 유사하였으리라 추정된다. 하지만 광주향약과 예안향약의 내용이 흡사하다는 것은 광주향약이 145(文宗 元年), 예안향약이 1556(明宗 11)에 각각 입조되었다는 시기상, 지역상의 차이를 생각한다면 여러 가지 의문이 생긴다.

세 조목을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벌조에서의 차이는 광주향약은 벌을 상하로, 예안향약에서는 극벌중벌하벌로 구분하며, 극벌의 경우는 다시 상하로 나눈다. 조목의 차이로는 예안향약에서 추가된 조목이 몇 가지 있는데 그 내용을 분석해 보면 극벌의 7조목인 수절하는 과부를 꾀이고 협박하여 더럽히고 간통하는 자, 중벌의 10조목 이웃과 불화한 자, 14조목 무뢰하게 도당을 모아 자주 난폭한 짓을 저지르는 자, 16조목 유언비어를 조작하여 남을 모함하는 자, 19조목 혼인과 상제에 이유 없이 때를 넘기는 자, 21조 향론에 복종하지 않고 도리어 원망을 품은 자, 22조목 집강이 사사로이 향안에 들인 자, 23조목 구관을 전별하는데 이유 없이 불참하는 자로 모두 7개 조목이 예안향약에 추가되어 있다. 하벌에는 27조목 자리를 비워놓고 편리한 대로 하는 자, 28조목의 이유 없이 먼저 나가는 자가 새로이 추가된 조목이다. 부칙에서는 광주향약조목은 31조목에 많은 공채를 받아 모탈하며 납부치 않는 자, 32조목 신임(信任)으로 사족을 능멸하는 자가 기록되어 있는 반면, 예안향약에는 서인으로서 사족을 능멸하는 자가 기록되어 있다.

이와 관련하여 박익환은 양과동동계를 입약한 이선제와 농암 이현보(聾巖 李賢輔, 1467~1555)와의 관계에서 실마리를 찾는다. 그는 두 사람이 시대는 달랐으나 농암이 약간 늦게 조정에 진출하면서 이선제의 유고(<광주향약>이 실려 있음)를 읽었을 가능성이 있었고 이것이 퇴계에게 전달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박익환의 주장[朴翼煥, 15世紀 光州鄕約鄕規約的 性格, 韓國理解, 1991.]퇴계선생전집59향립약조서기록을 근거한 것인데 그 내용은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고 숭정지사 농암선생(故 崇政知事 聾巖先生)께서 이를 근심하여 일찍이 약조를 세워 풍속을 장려하려 하였으나 정중하여 미치지 못하였다. 지금 지사의 여러 아들들이 바야흐로 경내(境內)에서 상()을 당하였고, (퇴계) 역시 병으로 향리에 돌아와 있으니 향장(鄕丈)들이 모두 우리 몇 사람에게 속히 선생의 뜻을 이루라고 책임 맡김이 심히 지극하여 사양하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에 서로 함께 상의하고 그 대강만 들어서 이같이 한 다음 향인들에게 두루 보여 가부(可否)를 물은 연후에 정하였으니 오래도록 시행하여도 폐가 없을 것이다.

 

이는 향속이 나빠져 감을 걱정하는 농암 이현보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마련하게 되었다는 것으로 이 때 만든 약조가 퇴계에 의하여 독단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논의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박익환은 바로 여러 사람과 함께 상의를 하여 만들었다는 부분을 근거로 두고 주장하고 있지만 이 또한 추론일 뿐 정확한 것은 아니다.

이 의문점에 대해 박순은 논문[朝鮮前期 光州지방의 鄕約洞契, 東西史學5, 韓國東西史學會, 1999]에서 1451년 광주향약조목과 1556년 퇴계의 예안향약을 비교하여 두 향약이 100여년의 시차를 보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이 거의 흡사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유사성은 시기적으로 후대의 것인 퇴계의 예안향약이 광주의 것을 그대로 인용했는가에 대하여 몇 가지 가능성을 대두시켰다. 그 내용은 퇴계와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 1510~1560)와의 관계로, 두 사람의 깊은 교류로 퇴계는 하서를 찾아 광주와 이웃한 담양을 자주 방문하였다고 하니 담양을 방문하였을 때 광주향약을 보았을 가능성도 있다고 박순은 유추하고 있다. 하지만 이에 관한 정확한 자료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양과동향약 관련 문서. 사진=광주광역시 남구청
양과동향약 관련 문서. 사진=광주광역시 남구청

 

호남의 광주지역과 경상도 예안과의 거리상의 차이, 두 향약의 성립 시기의 차이를 생각하면 앞으로 이 두 향약에 관한 좀 더 심층적인 연구가 진행되어져야 할 것이다.

1451년 입안된 광주향약절목은 태조가 1393년 고향인 함흥에서 사족들을 대상으로 작성한 <향헌>과 이를 1458년 효령대군이 증보한 <증제향헌목>이 있다. 특히 태조가 작성한 <향헌>의 영향을 받은 것일 수도 있다는 설도 있다. 따라서 다음 호에서는 태조와 효령대군이 제정한 <향헌><향헌목>을 살펴보고자 한다.

 

조선시대 향촌사회의 자치규약’. ‘향약의 사전적 의미이다. 여기에 바로 이어지는 것은 덕업상권’‘과실상규’‘예속상교’‘환난상휼등 학창시절 역사시간에 달달 외웠던 향약의 4대 강목이다. 다분히 정형화되고 박제화 된 향약에 대한 인식을 바꿔준 것이 바로 조선시대 기층민들의 상부상조 자치조직 촌계이다. 오늘날 주민자치의 한 원형과 단초를 제시해주기 때문이다. 이에 조선시대 향약 연구 전문가로 사단법인 한국자치학회 부설 향약연구원장인 박경하 교수의 향약이야기를 연재한다. 전통시대 향약·촌계를 재조명함으로써 오늘날 주민자치에 주는 의미와 시사점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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