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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친구에게 필요한 말...영화 '레슬리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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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친구에게 필요한 말...영화 '레슬리에게'
  • 운성은 영화평론가
  • 승인 2024.01.19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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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사람들 그리고 영화
Town in Movie

영화에서 주인공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행위는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리틀 포레스트’(감독 임순례)혜원’(김태리)처럼 연애도 취업도 뜻대로 되지 않는 일상을 잠시 멈추기 위해 고향을 찾는 경우, 귀향은 쉼과 평안의 의미를 갖는다. 혜원은 돌아가신 어머니의 레시피로 손수 밥을 지어먹으며 몸과 마음이 건강해지는 것을 느낀다. 어릴 때부터 격 없이 지내던 친구들과의 만남에서는 아무런 고민이 없던 시절의 맑은 기분까지 되살아난다. 그것은 고향을 떠나보지 않은 사람들은 알 수 없는 감정이다. 혜원이 고향에서 사계를 보내며 그 시간들을 소중히 여기게 된 것은 도시에서의 생활이라는 비교 대상이 있기 때문이다. 도시는 그녀에게 좌절과 아픔만 안겨주었지만 고향은 그녀에게 무엇이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용기와 기회를 제공한다.

한편 영화에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으려 하는 인물들도 있다. 그런 이들에게 고향은 구시대적 가치관을 가진 낡은 공간이거나 안간힘을 써서 벗어나려고 애썼던 감옥일 수도 있다. 또한 특별한 사유 없이 귀향이라는 행위 자체가 인생의 퇴보를 의미하기도 한다. ‘시네마천국’(감독 쥬세페 토르나토레, 1988)에서 알프레도’(필립 느와레)살바토레’(마르코 레오나르디)가 시골 마을을 떠나 성공하기를 원하는 마음에서 그를 첫사랑과도 떼어놓는다. 알바토레는 절대로 돌아오지 말라고 협박하듯 살바토레를 밀어붙이고 그렇게 집을 떠난 살바토레는 영화감독으로 성공한다. 그리고 알프레도의 부음을 들을 때까지 고향에 돌아오지 않는다.

 

귀향의 다양한 의미복권 당첨레슬리에게 6년 간 대체 무슨 일이?

 

레슬리에게’(To Leslie, 감독 마이클 모리스. 2023)레슬리’(안드레아 라이즈보로)는 다소 복합적인 이유로 고향에 돌아가지 않으려 한다. 사연 없는 귀신은 없다지만 레슬리에게는 그녀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는 사건이 있었다.

영화는 오프닝 크레디트와 함께 레슬리의 과거 사진들을 보여주면서 시작된다. 연인이나 아기와 함께 있는 사진 속 레슬리는 여느 젊은 여성들처럼 매력적이다. 곧 이어 그녀 인생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순간이 뉴스 영상으로 재현된다. 복권에 당첨되어 19만 달러의 상금을 받게 된 레슬리는 연신 환호성을 지르며 리포터와 인터뷰를 나눈다. 상금으로 뭘 할 거냐는 질문에 레슬리는 글쎄요. 집도 한 채 사고, 우리 아들한테 선물도 사 줘야겠죠?’라고 답한다. 카메라 밖에서 이웃들이 우리한테는 뭐 없어?’라고 묻자 레슬리는 조금은 거만하게, 큰 소리로 응수한다. ‘내가 거하게 한 잔 쏜다!’

복권 당첨이라는 행운 앞에 차분한 사람이야 있을까마는, 이 영상에서 레슬리는 지나치게 흥분한 듯 보인다. 리포터와 인터뷰 중에도 몸을 가만히 있지 못하거나 계속 소리를 질러대는 모습에서 그녀의 다혈질적이고 감정적인 성격이 잘 드러난다. 이와 대조적으로 바로 다음 숏에서 그녀는 어두운 모텔 침대 위에 몸을 웅크리고 있다. 풀 샷으로 잡은 이 정적인 영상 다음, 블랙 아웃된 화면에는 자막이 하나 뜬다. ‘6년 후’. 당첨금으로 집을 사겠다고 했던 레슬리는 숙박비를 못 내 모텔에서 쫓겨나는 중이다.

몇 년 전, 독립영화계를 뜨겁게 달궜던 플로리다 프로젝트’(감독 숀 베이커, 2017)를 본 사람이라면 집 없이 모텔에서 주 단위로 돈을 내며 지내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침대 한두 개와 화장실이 전부인 모텔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미국 사회에서 아마도 노숙자 다음으로 가난한 이들일 것이다. 그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레슬리는 모텔 주민(?)들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애원도 해보고 모텔 직원을 협박도 해보지만 결국 거리에 내팽개쳐진 캐리어 하나를 집어 들고 그 곳을 떠난다. 그토록 비참한 상황에서도 오히려 거친 욕을 하며 고개를 빳빳하게 쳐드는 레슬리의 모습에서 다시 한 번 그녀의 범상치 않은 성격을 확인할 수 있다.

무일푼의 레슬리는 고향으로 가지 않고 아들 제임스’(오웬 티그)가 있는 곳으로 간다. 훌쩍 커버린 제임스는 엄마에게 최대한 애정을 표현하려 애쓰고, 레슬리는 그런 제임스를 대견하다는 듯 바라본다. 그러나 레슬리는 혼자 남게 되자마자 제임스가 그의 집에서 하지 말라고 했던 단 한 가지, 음주의 금기를 깨 버리고 만다. 여기에는 당연히 절도가 선행되었고 자연히 주사가 뒤따랐다.

 

고향으로 돌아간 레슬리, 삶은 달라질까?

 

조금도 변하지 않은 엄마에게 실망한 제임스는 레슬리를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마는데 사실 레슬리에게 그것만큼 두려운 일은 없다. 그러나 선택권이 없는 레슬리는 버스에 실려가 옛 친구인 낸시’(엘리슨 제니)더치의 신세를 지게 된다.

복권에 당첨되었던 레슬리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 영화는 구체적으로 말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동네 사람들의 수군거림과 대화를 통해 그녀가 19만 달러로 집을 사는 대신 흥청망청 술을 마시고 도박을 했다는 것, 그래서 그 돈은 전혀 남아 있지 않을 뿐더러 친구들의 신의도 잃어버릴 만큼 폐를 끼치고 떠났다는 것 등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부랑자처럼 살던 낸시와 더치는 레슬리가 도와준 돈을 밑천 삼아 성실하게 일함으로써 현재 오히려 안정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그들은 레슬리가 제임스까지 그들에게 내버리듯 맡기고 유흥을 즐겼다는 점에서 아직도 분노해 있으며 그녀가 변할 거라 믿지 않는다.

낸시와 아치를 비롯한 고향 사람들의 냉대는 레슬리를 깨우치게 하는 대신 계속 술을 찾게 만든다. 술은 또 다른 추태를 낳고 레슬리는 곧 온 동네의 비웃음거리가 된다. 한 때는 행운의 복권 당첨자로서 펍에도 사진이 걸려 있을 만큼 선망의 대상이었던 그녀의 몰락은 호사가들에게 술안주거리로 안성맞춤이었던 것이다.

같은 행태를 반복하다가 결국 낸시의 집에서도 쫓겨난 레슬리는 길바닥에 나앉을 위기에 처했다가 인생의 마지막 기회를 만난다. 레슬리가 떠난 후 이 지역으로 이주해 모텔을 운영하고 있는 스위니’(마크 마론)가 무엇 때문인지 그녀에게 연민을 느껴 일자리를 제안한 것이다. 레슬리는 일을 하면서도 한 동안 방황을 계속하지만 바에서 흘러나오는 한 곡의 노래에 감화된 후 마침내 과거를 청산하기로 결심한다. 망가진 라디오 같던 그녀가 주파수를 잡고 다시 음악을 송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금단현상의 고통을 견디는 그녀의 곁에는 이방인이나 다름없는 스위니가 있다. 어릴 적 친구이자 이웃이면서도 레슬리를 계속 인간말종 취급하는 동네 사람들과는 대조적이다.

과거를 철저히 반성하고 난 레슬리는 여전히 자신의 과오를 들추는 낸시를 향해 묻는다. ‘넌 내가 그렇게 망가질 때 왜 말리지 않았어? 우린 가족이었잖아.’ 그 동안의 원망과 한이 묻어나는 그녀의 목소리에 낸시도 말문이 탁 막혀버린다. 영화는 세월이 흐른 후 낸시가 레슬리를 찾아가 그간의 일을 사과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누군가 그녀에게 이런 말을 건네주었다면

 

대중들에게 이름이 많이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독립영화계에서 잔뼈가 굵은 배우, 안드레아 라이즈보로의 연기가 레슬리라는 드센 캐릭터를 굳세게 지탱해주지 않았다면 관객들은 이 영화에 몰입하기 어려웠을지 모른다. 안드레아 라이즈보로는 이 영화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까지 오를 만큼 훌륭한 연기를 보여주었다. 낸시 역은 아이, 토냐’(감독 크레이그 질레스피, 2017)에서 토냐의 엄마로 열연해 오스카상을 수상한 바 있었던 엘리슨 제니가 맡아 라이즈보로와 불꽃 튀는 긴장감을 만들어냈다. 전반적으로 극중 낸시의 비중은 높지 않은 편이지만 마지막 감동을 남기는 것은 레슬리와 낸시의 관계이기 때문에 엘리슨 제니라는 명배우의 캐스팅이 갖는 의미는 크다.

레슬리의 삶을 바꿔 놓는데 큰 역할을 한 유행가에는 이런 가사가 나온다.

허둥지둥하며 이런 삶을 사는 것 같네요. 당신은 너무 많은 고통과 불행을 불러왔죠. 하지만 주위를 둘러봐요. 당신과 나 뿐이에요. 당신은 정말 여기 있고 싶은가요?”

레슬리가 돈에 심취해 아들도 내버려 두고 유흥을 즐길 때, 아니 그 한참 후 그녀가 나락에 빠졌을 때라도 누군가 이런 말을 건네주었다면 어땠을까. 동네 친구이자 이웃이자 가족이라 믿었던 사람들의 암묵적 시샘과 방관이 레슬리 모자의 삶을 더 망가뜨렸던 것은 아닐까.

 

사진=영화사진진

 

많은 영화의 배경이 마을이다. 영화 주인공들의 삶의 터전 역시 그들이 사는 마을이고 동네이기 때문이다. 스크린 속 인물들은 배경이 되는 마을, 그리고 이웃들과 때로 갈등하고 협력하며 여러 이야기들을 만들어나간다. 그 이야기의 결말은 해피엔딩이 되기도 하고 비극으로 치닫기도 한다. 앞으로 마을, 사람들 그리고 영화에서는 마을과 사람들의 케미스트리, 그들 사이의 교감과 성장, 변화를 다룬 작품들을 소개한다. 그 속에서 주민자치의 바람직한 방향, 때로 반면교사의 깨달음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편집자 주]

 

 

* 영화의 내용이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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