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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령대군 '향헌목'의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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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령대군 '향헌목'의 성격
  • 박경하 한국주민자치학회 부설 향약연구원장(중앙대학교 역사학과 명예교수)
  • 승인 2024.02.06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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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흥과 영흥지방은 조선왕조 발상지로서 국초부터 고을을 미화하고 향풍을 가꾸려는 노력이 꾸준히 전개되었다. 태조는 즉위 29월에 자신의 출생지인 화령부(和寧府)를 영흥부(永興府)로 고치고, 한 고조의 태생 지명을 본떠 이곳을 풍패향(豊沛鄕)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태조의 친제향헌(親製鄕憲)을 풍패향헌(豊沛鄕憲)이라고도 한다.

또 함경도의 경재소(京在所)는 왕족들이 책임을 맡고 있었다. 1478(성종 9)에 이르기까지 명천 이남의 함흥·영흥부에 딸린 여러 읍의 경재소(京在所)는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이 분장하였다. 경성 이북의 6진은 진양·안평대군 등이 취임하여 소관 주군의 일을 주관하고 있었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제시된 것이 태조가 지은 풍패향헌과 효령대군의 증제향헌이었다. 또 이 향헌의 계속적인 보급과 준수를 독려하기 위한 조직으로 향좌목(鄕座目)[鄕案]이 작성되었고, 이 향좌목의 작성에 있어서나 유향소의 향임(鄕任)에 나아갈 수 있는 향촌 사족들의 불법패리를 규찰하기 위한 규식으로 향헌이 제정되었다.

조선말기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효령대군영정
조선말기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효령대군영정

 

경재소와 향헌, 선목과 악목

풍패향헌과 증제향헌의 입헌취지와 의도를 살펴볼 수 있는 사료로는 1456(세조 4) 48일에 효령대군이 교지를 받들어 쓴 선향헌목서(璿鄕憲目序)'가 있다. 이제 이 서문을 검토하여 보면, 향헌을 세운 취지는 다음과 같다.

 

무릇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 고을이다. 고을 기강의 은 무엇인가? 기강이다. 고로 개국종실인 신이 교명을 받은 이래로 늘 걱정하여 오다 오직 한 책을 지어 그 이름을 풍패현향록안이라 하였다. 향록안의 뜻은 조정의 사록안과 같다.”(夫人生成聚曰鄉,鄉之爲宗 何謂乎 紀綱是也 故開國宗室 臣愚受命以來 夙夜憂懼 惟獨著書 以名之曰豐沛邑鄉錄案 案之義 泰同於朝廷之仕錄案.)

 

위 글에서는 향강을 바르게 하기 위해 조정의 사록안[조정에 출사하고 있는 관원의 명부으로서 사판(仕版) 혹은 장안(政案)이라고도 함]을 본받아 풍패읍 향록안을 작성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태조친제헌목은 크게 5대 강목으로 나누어 그 아래 각각 8개조씩 총 40개조의 헌목(憲目)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입적(入籍)과 해손(解損)에 관한 규정이 부기되어 있다. 이 글은 효령대군이 지은 증제헌목에 초점을 두기에 친제헌목의 구제적 내용은 생략한다.

선향헌서(璿鄕憲目序)’의 끝에도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이 1458(세조 4) 4월에 전지를 받들어 지었다는 헌목이 바로 효령대군의 증제향헌목(增製鄕憲目)이었다. 이 증제헌목의 강헌목(綱憲目)을 보면 선목과 악목의 2대 강목으로 구별되고, 선강목善綱目21개 헌목, 악강목惡綱目35개 헌목으로 되어 모두 2강목 56개 헌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선목(善目)

父母孝養 土主尊敬 夫婦和順 男女有別 少長有序 朋友有信 喪祭誠敬 隣里和同 敬老慈幼 學書通古 患難相救 婚姻相助 臨亂執節 官事勤儉 受人寄托 持身廉謹 見善必行 開過必改 務農節用 田畔相讓 學書習武

 

악목(惡目)

父母不孝 疏薄正妻 妻妾背夫 土主不敬 男女無別 朋友不信 兄弟不和 隣里不睦 患難不救 窃人妻妾 婚姻不助 盜賊害物 喪祭不謹 官員欺罔 官事不謹 寄托不受 無故闕防 好訟行讒 旅師弄權 妓生作妾 爭鬪相殘 奸吏作弊 賄賂于請 以强凌弱 以小凌長 賤人結友 以賤凌貴 行已無恥 以惡凌善 憑公營私 冠服無章 田畔相侵知非謬舉 挾私論人 惰農虛費

 

이상의 56개 조목의 성격을 검토하면 선목과 악목에는 부모, 부부, 형제 등의 윤리의식, 마을에서의 환난상휼 등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처첩간의 도치관계, 천인과의 교유 등에 대한 신분질서를 강조하고 있다. 관의 우위를 유지하고 농권하는 행위를 규제하였다. 이는 이 규약이 일반 상천을 대상했다기보다는 향촌지배자로서의 양반들에 대한 자기규제를 강조한 성격으로 파악된다.

 

일률적 아닌 지역별 다양한 특성의 향약

필자는 1992<조선후기 향약의 성격>을 주제로 박사학위논문을 작성하였다. 이 논문에서 향약의 성격를 네 가지로 구분하였다.

조선시대에서 향약은 향약 향규약 향헌 동계 동약 촌계 촌약 등 다양한 용어로 표현되었으나 재지사족은 지방지배를 위하여, 국왕의 대행자인 수령은 지방통치를 위해서, 상천민들은 같은 신분간의 상호부조적 목적에서 향약을 시행하였다.

조선시대의 대지방통치정책은 사족들에게 분권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의 자치권을 인정하는 방식이었다. 따라서 지방 사족들은 자치적 요소가 강한 향약을 시행하였으나 그 향약의 성격은 일률적이 아니고 지역별로 다양하였다.

조선후기 향촌사회 내에서 재지사족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하여 일군현 단위에서 조직된 오늘날과 유사한 지방의회적 기능으로서의 향규(鄕規), 동리단위에서의 재지사족의 대민지배로서의 동계(洞契), 왕권의 대행자인 수령이 지방통치를 위하여 앞장서 실시한 주현향약(州縣鄕約), 그리고 주로 자연촌락에서 기층민간에 상호부조하던 생활공동체로서 오늘날 주민자치적 성격의 촌계(村契)로 구분할 수 있다.

조선에서는 중국 송대 여씨 네 형제들이 만든 <여씨향약>을 주자가 증손해 재작성한 <주자증손여씨향약>을 시행했는데 수령이 시행한 향약인 주현향약은 이 주자증손여씨향약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향규는 향촌지배자로서의 재지사족 양반들 간의 자기규제적 내용을 담고 있다. 조선 초기부터의 향규는 여씨향약을 참고하지 않고도 나올 수 있는 규약이고 조선시대의 유교 윤리, 환난상휼 등과 더불어 중국과 다른 엄격한 신분제적 요소가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효령대군이 작성한 향헌목은 이러한 향규의 성격을 가지고 있고 이후 모든 군현에 존재했던 향규의 전형으로서의 측면이 있는 게 아닌가 한다.

효령대군의 사당과 묘소가 있는 청권사
효령대군의 사당과 묘소가 있는 청권사

 

효령대군 <향헌목>, 유교윤리-상호부조-구휼적 성격에 엄격한 신분제적 요소 반영돼

효령대군 <향헌목>의 특성은 이후 각 군현의 향규로 수용되어 후세에 영향을 미쳤다. 이의 좋은 실례가 임진왜란 후인 1595(선조 28)에 중수된 '만력을미향헌(萬曆乙未鄕憲)’이라 할 수 있는데 여기에는 태조친제향헌은 빠져 있고 효령대군 56조와 유향소 조규가 부록되어 있다.

또 개국 503(1894)에 편찬된 것으로 되어 있는 관북영흥읍지(關北永興邑誌)’에는 효령대군의 향헌목 뒤에 효령대군교헌서(孝寧大君敎憲書)'라고 제목을 붙인 뒤에 향헌목을 열기하고 있다. 효령대군의 향헌목은 왕실의 함흥과 영흥지방 향사족들이 향원들의 자치조직 규약으로 수용되어 내려 왔으며 타 군현의 향규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사진=문화재청

 

조선시대 향촌사회의 자치규약’. ‘향약의 사전적 의미이다. 여기에 바로 이어지는 것은 덕업상권’‘과실상규’‘예속상교’‘환난상휼등 학창시절 역사시간에 달달 외웠던 향약의 4대 강목이다. 다분히 정형화되고 박제화 된 향약에 대한 인식을 바꿔준 것이 바로 조선시대 기층민들의 상부상조 자치조직 촌계이다. 오늘날 주민자치의 한 원형과 단초를 제시해주기 때문이다. 이에 조선시대 향약 연구 전문가로 사단법인 한국자치학회 부설 향약연구원장인 박경하 교수의 향약이야기를 연재한다. 전통시대 향약·촌계를 재조명함으로써 오늘날 주민자치에 주는 의미와 시사점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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