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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글] 주민자치지원관 존재 자체로도 흉凶이고 악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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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글] 주민자치지원관 존재 자체로도 흉凶이고 악惡이다
  • 전상직 한국자치학회 회장·본지 발행인
  • 승인 2020.05.04 10: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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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상직 한국자치학회 회장·본지 발행인.
전상직 한국자치학회 회장·본지 발행인.

“주민자치위원이요? 자존심이 상해서 못하겠습니다. 읍·면·동장들이 감 놔라 대추 놔라하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주민자치지원관까지 가세해서 주민자치위원을 머슴 부리듯합니다.”

현장에서 만난 주민자치위원의 감정은 격앙돼 있었다.

“1년도 채 근무하지 않고 떠나는 동장이 주민에게 무슨 애정이 있을 수 있으며, 주민도 아닌 지원관이 자치에 무슨 관심이 있을 수 있을까요?

동장이 주민자치라는 판에서 춤을 추고, 그런 지원관이 주민자치라는 판에서 노래하며 즐기는 것을 주민자치위원들은 구경해야 합니다. 추임새까지 넣어야 하구요.”

주민자치위원장의 토로다.

속이 상하다 못해 울분이 터질 때도 많습니다만 관제당하기 싫어서 삭이고 맙니다.”

이것이 대한민국의 주민자치 현실이다.

마을을 사랑하는 주민은 약자다

나태주 시인의 시가 생각난다.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단연코 약자라는 비밀.

마을에서 먹고 자고 살아가는 사람은 마을을 사랑할 수밖에 없으며 그 사랑 때문에 언제나 약자다. 조선 시대에는 양반이, 일제강점기 때에는 앞잡이가, 대한민국에서는 관료가 나대고 휘저어도, 마을을 사랑하는 마음에 주민은 언제나 약자였다. 지금도 약자다. 주민들은 마을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에 모나지도 못하다.

조선의 향촌자치가 주는 교훈

조선의 향촌자치 역사가 우리에게 일러주는 것은, 훈구파도 사림파도 양반들은 모두 주민을 지배하려고 주민의 자치를 허용하지 않았다. 양반들이라는 것이 향촌에서는 존재만으로도 대부문 흉(凶)하고 악(惡)했다.

사림파가 먼저 양반 관료로부터 향촌을 독립시키겠다고 향약을 시행했으나, 향촌을 지배하는 향약의 상부구조는 배타적으로 점유해 버렸다. 향촌은 양반 관료의 통치와 양반 사림의 향약을 통해 이중지배를 받게 됐다.

향약은 겉으로는 향촌 사회의 자치를 주장했지만, 속으로는 양반 사족이 관료에 맞서서 주민을 지배하자는 의도였다.

이를 간파한 율곡은 향약의 폐해를 적확하게 지적하면서 실시를 중단하라고 강력하게 요구했다. 다음은 율곡의 말이다.

“향약(鄕約)이 강령이 바르고, 조항이 상세하니, 이것은 동지와 선비들이 서로 약속해 예를 강구하는 것이지, 널리 백성들에게 시행할 수 없는 것이다. 토호(土豪)들이 향약을 핑계로 백성들에게 괴로움을 끼칠 것이 뻔하다. 이것을 누가 단속할 것인가. 만약 향약을 행하게 되면 백성들은 반드시 더욱 곤란하게될 것이다.”

율곡의 지적은 이렇다. 향촌을 공동체로 만들자는 좋은 향약도 먼저, 주민들이 실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며, 아무리 좋은 규범도 주민들에게 맞지 아니한 것을 강요하면 독약이 된다는 것이다.

주민자치 지원관들에게 바란다

율곡의 우려 섞인 지적을 지금은 필자가 주민자치지원관에게 한다. 시민운동가들이 영리적이고 정치적으로 설계한 마을 공동체를 단체장들의 힘을 빌려서 주민들에게 강요하고 권력으로 시행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주민의 자치가 아니다. 시민운동도 아니다. 주민자치지원관이 하는 일은, 굳이 한나아렌트의 입을 빌리지 않더라도, 궤도에서 멀리 벗어나 있다.

주민자치는 기본적으로 주민들이 민주적으로 자치하는 것이다. 주민들이 민주적으로 자치할 수 없도록 하는 제도의 모순에 눈을 감고, 모순된 제도에 편승하는 것은 장도가 양양한 사람이 할 일은 아니다.

주민자치라는 원칙에 다시 눈을 떠보면,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저들은 저들이 하는 바를 모릅니다”고 한 지적과 석가가 “집착 없이 마음을 내어라”는 가르침처럼 주민자치는 오로지 주민과 자치로만 생각할 때 길은 열린다.

그 길은 사람을 인격자로 만들어주고, 마을을 공동체로 만들어 줄 것이다. 진정으로 마을을 공동체로 만들겠다면 먼저, 주민으로 마을에서 성실하게 자치해 보라. 그러면 길이 열릴 것이다.

문재인 정부에 촉구한다

문재인 정부는 마을을 그냥 놔두기 바란다. 가만히 놔두면 주민이 자치한다. 백보 양보해도 마을의 유지를 무지몽매하다고 비판하는 것을 넘어서서 주민자치지원관을 보내서 지역 유지를 무력화하고 주민의 자치를 무력화 한다면, 일제가 마을을 강점하던 정책들과 무엇이 다른가를 엄밀하게 묻고 싶다.

아직도 오만한 시민운동가들 주도로 마을을 공동체로 만들 수 있다는 박원순 시장의 사고에 동의하는가? 풀뿌리 자치를 활성화하기 위해 획기적인 분권을 하겠다던 초심으로 돌아가서 살펴보면, 박원순 시장의 정책은 자치분권은 하지 않고 주민자치회에 총독을 파견해 주민의 자치까지도 영향력 하에 두겠다는 것이다.

실제로 주민자치지원관들의 행태는 주민의 자치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고, 주민자치를 시민단체에 귀속시키는 일에는 참으로 열심이었다. 문재인 정부가 박원순 시장의 정책을 그대로 따라한다면 혹은 주민자치를 시민단체의 처분에 맡긴다면, 주민자치는 자치의 십자가 위에서 고초를 겪겠지만 결코 사라지지는 않는다.

주민자치는 주민의 자치요, 마을의 자치요, 생활의 자치다. 주민자치회를 주민회, 마을회, 자치회로 만드는 분권을 먼저 하기 바란다.

초라한 고백

다시 나태주의 시 ‘초라한 고백’이다.

내가 가진 것을 주었을 때/ 사람들은 좋아한다. 여러 개 가운데 하나를/ 주었을 때보다/ 하나 가운데 하나를 주었을 때/ 더욱 좋아한다.

오늘 내가 너에게 주는 마음은/ 그 하나 가운데 오직 하나/ 부디 아무데나 함부로/ 버리지는 말아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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