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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정기 민주화 개혁과 일본 주민자치 제도 변화 콜로키움] “외적으론 자치제도 도입, 내적으론 관치 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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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정기 민주화 개혁과 일본 주민자치 제도 변화 콜로키움] “외적으론 자치제도 도입, 내적으론 관치 심화”
  • 박 철 기자
  • 승인 2019.06.10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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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동 충남대학교 자치행정학과 교수
김찬동 충남대학교 자치행정학과 교수

문제제 기

한국의 주민자치 제도는 그 길을 잃고 있는 듯하다. 주민자치위원회를 통해 주민자치를 제도로서 도입했지만, 취미여가운영위원회와 동장의 자문기구에 불과해 주민 없는 주민자치가 되고 있다는 비판에 직면하게 됐다. 이 비판을 벗어나고자 주민자치회 시범실시를 시도했지만, 여전히 협력형 주민자치 모델만 도입해, 실질적인 주민자치로 나아갈 수 있는 여지가 있던 통합형과 주민조직형 주민자치 모델은 사문화 시켜버렸다.

이렇게 되자 20여 년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지방자치 제도까지도 역주행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국정은 더욱 제왕적 대통령적 국가집권화 현상과 양극화와 불균형 지역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제도 마비현상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메르스 사태 라든가 세월호 대응의 미숙함이었다.

국가 차원에 대한 대응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 주민자치에 대한 새로운 길을 만들려는 시도들이 나타났다. 즉 송파동 세모녀사건을 통해 복지사각지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찾동(서울시) 제도설계라든가, 마을 공동체 만들기 사업을 기반으로 한 서울형 주민자치 모델의 등장이다. 이것은 마을계획 수립을 위한 주민총회와 주민참여 예산제도와의 연계를 통해 주민자치의 실질적인 권한을 부여하기 위한 시도들이다. 그리고 주민자치를 지원하기 위한 지원관이라고 하는 공무원과 지원조직을 예산으로 설치한 것인데, 일견 주민자치를 강화하고 기반을 조성하는 사회SOC로 보이지만, 여전히 관치패러다임의 근간을 벗어나지 못하는 실책이지 않은가 한다.

물론 현실의 개혁이 이상적인 이데아로 직접 전환될 수 있는 것은 아니기에, 중간단계로서의 전략과 전술을 통해 목표하는 이상적 주민자치와 민주적 지방자치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현재의 이런 시도들에 대한 모니터링이 필요하고, 목표하는 그림으로 전환하는 제도적 경로가 제대로 갈 것인가에 대한 다각적인 검토가 필요할 것이다.

이에 대한 시사점을 얻고자 일본의 전후 개혁에서 시도됐던 GHQ(General Headquarters, 미군정기)의 민주화 개혁과 지방분권화 정책들이 왜 실패했고, 어떤 상황과 세력들에 의해 저항을 받았는가를 조사하고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GHQ는 점령개혁 이라고 하는 강력한 권력을 바탕으로 일본의 민주화정책과 분권화정책을 시도했음에도 어떻게 지방자치와 분권화가 실패하고 말았는가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즉 일본에서는 이런 자치분권 정책의 중단 혹은 역주행을 ‘역코스’라고 하는데, 역코스 제도를 한국은 제도 벤치마킹을 했던 셈이어서 결과적으로 일본 내무성 관료들의 민주화에 대한 저항과 자치분권화에 대한 반발까지도 답습하게 된 것은 아닐까 한다.

한국의 지방자치분권정책과 풀뿌리 주민자치, 그리고 민주주의 생활화를 위해서는 특단의 조치와 개혁이 필요하다. 기존의 중앙집권 시스템과 기득권에 의한 저항과 도전이 만만치 않은 것이고, 이것은 일본에 대한 GHQ의 강력한 점령 관리정책에서도 나타난 것이고, 실패하고 말았다는 것을 교훈 삼을 때, 한국의 주민자치 실질화의 길은 험난할 것이 예상된다.

이 시대의 지성과 지혜가 모아져야할 것이고, 21세기 새로운 한국을 만들고자 하는 비장한 각오로 주민자치의 길을 개척해 나가야 할 것이다.

일본 점령과 GHQ의 민주화개혁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 발발로 시작된 15년간의 태평양전쟁은 1945년 8월 14일 포츠담선언 수락과 8월 15일 천황의 패전방송으로 종결됐다. 그리고 9월 2일 미주리호 함상에서 일본은 항복문서에 조인했고, 천황과 일본정부의 권한은 연합국 최고사령관에 종속돼 주권이 제한됐다.

포츠담선언 속에는 군국주의를 이끈 권력과 세력의 근절, 신질서건설과 잠재적 전쟁능력의 파괴가 확인될 때 까지 일본을 점령, 민주적 경향의 부활과 강화, 언론 종교 사상의 자유를 포함한 기본적 인권존중의 확립, 일본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 평화적이고 책임 있는 정부가 수립됐을 때 점령군은 철수함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타케마에, 2011 : 189). 여기서 포츠담선언과 관련된 일본 점령은 미국만의 결정이 아니라, 미영중소의 공동선언에 의한 것이고, 11개 국이 참여한 극동위원회가 1947년에 결정한 ‘항복후 대일 기본정책’에도 동일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것이었다.

즉 연합국 최고사령관은 점령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일본 헌법이나 법률적 제약을 받지 않고, 일본정부의 의사에 구애받지 않고 어떤 조치도 취할 수 있는 합법성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국제법상 규정된 점령 하의 일본의 법적 상태였다. 이를 ‘점령관리’라고 하는데, 새로운 형태의 점령이었고, 교전 중의 군사점령(일반점령)이나 보장점령(1차세계대전 후 연합국에 의한 라인강 좌안 점령)과는 다른 개념이라고 한다(전게서,192).

점령군은 진주 후 매스컴을 정부 통제에서 해방하고, 프레스 코드를 통해 점령목적인 비군사화와 민주화를 위한 선전에 이용했고, 천황제에 대한 비판도 자유롭게 허용했다. 1946년 5월에는 일본정부가 천황제 비판에 대해 불경죄를 적용하는 것에 대해 GHQ는 격노해 불경죄 자체를 폐지하기도 했다.

1945년 10월에는 인권지령으로 치안유지법 등 탄압입법을 폐지하고, 정치범의 석방, 특고경찰직원이나 내무대신, 경찰부장 등을 파면했다. 비합법화됐던 일본공산당도 합법화시켰다. 또 맥아더는 시데하라 키주로 수상에게 여성 해방, 노동조합의 조성, 교육의 자유화와 민주화, 비밀탄압기구의 폐지, 경제기구의 민주화를 지령하는 ‘5대개혁지령’을 지시했다.

다음으로 전범체포도 진행돼 9월 11일에는 토조 히데키를 시작으로 토고시게노리, 히로타코키, 시마다 시게타로, 코노에 후미마로 등 군인만이 아니라 문관과 황족등 103명의 A급 전범용의자에 대한 체포 명령이 내려졌다. 기소자는 28명이었고, 통상적인 전쟁범죄외에 평화에 대한 범죄, 인도주의에 대한 범죄 등을 물어 개인의 형사책임을 문제 삼았다. 또 B급과 C급 전범 1000여 명이 미국,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네덜란드, 중국 국민정부, 프랑스, 필리핀 등에서 처형됐다. 소련에서는 3000명의 전범을 처형했다고 한다. 반면, 중국 인민해방군은 일본인 전범을 처형하지 않고 개과천선시켜 일본에 송환했다.

한편, GHQ에 의한 민주화정책은 먼저 정당과 정치 활동을 자유화 하고, 선거법을 민주적으로 바꿔서 선거를 통해 국민의 의사가 자유롭게 표명되는 국회를 만드는 것이었다. 1945년 12월에 중의원 선거법이 개정돼 국민의 반수를 점하는 여성의 참정권이 일본 헌정사상 최초로 인정됐다. GHQ 내부에서는 국민들의 자유로운 의사표명을 위해 중선거구 완전연기제(完全連記制)와 기호식 투표방식을 주장하는 의견이 강했지만, 민정국장 휘트니와 맥아더의 결단으로 ‘대선거구 제한연기제’와 ‘기입식 투표방식’으로 승인됐다.

그리고 GHQ는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하며, 1946년 1월 4일에 공직추방령에 의해 군부영합선거로 선출된 의원들의 입후보를 제한했다. 이 공직 추방령에는 정계만이 아니라 관계, 재계, 언론계, 노동계, 교육계 등 거의 모든 분야에 적용돼 각계에서 지도자의 교체나 세대교체가 일어나서, 전후 일본 발전의 원동력을 형성했다고 한다(전게서,196).

전쟁 포기와 일본헌법 9조

GHQ는 강력한 리더십을 바탕으로 1946년 11월에 일본국 헌법을 공포했는데, 여기서 천황은 정치적 기능이 대폭 제한됐고, 국가 및 국민의 통합의 상징적 존재로만 남겼다. 그리고 주권이 국민에게 온전히 부여됐다. 또 입법, 행정, 사법의 3권이 분립됐고, 국회는 선거를 통해 선출된 의원으로만 구성돼 국권의 최고기관으로서 자리매김 했다. 또 의원내각제가 채택돼 행정권이 내각에 속하게돼 수상의 권한도 강화됐다.

일본의 신헌법에서 특이한 조항은 제9조의 전쟁포기 규정이다. 헌법 제9조는 국제분쟁 해결수단으로서의 전쟁을 포기하고, 육해공군의 전력을 보유하지 않으며, 국가의 교전권도 부인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3000만명의 사상자를 낸 것에 대한 어리석음에 대한 저주와 반성에서 생겨난 것으로 항구적인 평화를 확립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일본의 안전과 생존을 평화를 애호하는 다른 나라 사람들의 공정함과 신의에 맡기겠다는 의미가 들어있는 조항이다.

1946년 2월의 ‘헌법 기초에 관한 맥아더 노트’에 의하면, 민정국에 GHQ 헌법 초안을 작성하도록 했고, 여기서 첫째, 천황제 존치(입헌군주제), 둘째는 전쟁(자위전쟁 포함) 포기와 전력 불보유 및 교전권의 부인, 셋째는 봉건제도 폐지와 귀족제 개혁으로 돼있다. 요시다 시게루 수상이 제90회 제국의회에서 “자위권 발동으로서의 교전권을 포기한 것”이라고 답변한 것처럼, 전쟁 포기란 자위전쟁도 포기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요컨대 일본의 신헌법으로 인해 민주화 개혁의 헌법적 토대가 만들어 진 것이다. 당시 헌법문제 조사위원회에서 만들었던 마츠모토안은 주권재군(主權在君)인 채로 고색창연한 것이었다고 한다. GHQ는 이를 거부하고, GHQ안을 만들어서 제시했던 것이고 최고사령관의 강요라기보다는 수락하지 않을 경우 일어날 가능성(천황을 전범 재판에 회부 및 천황제 폐지)에 대한 주의 환기시킨 것을 일본이 자유의지로 수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지방자치개혁

경찰 개혁 GHQ의 구 권력 해체와 민주화의 개혁은 1947년 경찰법을 통해 전전의 경찰 제도를 개혁해 ‘지방분권화’했다. 전전에 내무성 경보국이 통할하던 경찰행정을 신법에서는 공안위원회 소관으로 전환했다. 공안위원회는 국가 공안위원회, 도도부현 공안위원회, 시정촌 공안위원회로 구분된다. 일본의 경찰 제도는 국가경찰과 자치체경찰로 구분된다. 자치체경찰은 미국의 시민경찰을 모델로 한 것이다.

국가지방경찰은 정원이 3만명, 군(郡) 단위 치안 담당, 조직계통은 ‘내각총리대신, 국가공안위원회 및 국가지방경찰대(국가지방 경찰본부, 경찰관구본부, 도도부현 국가지방 경찰)’로 이뤄졌다. 자치체 경찰은 정원이 9만 5000명,시와 인구 5000이상의 정촌(町村)에 설치됐다. 시정촌장의 소관 하에 시정촌 공안위원회가 설치됐고, 시의 재정으로 운영됐다. 그런데 자치체경찰은 지역 보스와 유착하기 쉽고, 재정적 부담이 크다는 점에서 반대하는 의견이 강했다.

GHQ 내부에서도 경찰의 능률화에 중점을 둔 참모 제2본부와 민주화에 중점을 뒀던 민정국 사이에 국가지방경찰과 자치체경찰의 비중을 두고 대립이 심했다(전게서, 207). 그러나 결론적으로는 국가지방경찰이 통신설비를 장악 했고, 경찰학교 지도권을 장악해 중앙집권화된 경찰로 변질돼 1954년에는 자치경찰제가 폐지됐다. 즉 경찰의 민주화가 된 것처럼 보였지만, 그 실질은 여전히 중앙집권화된 경찰로 법이 개정되고 말았다.

지방자치 개혁 일본의 신헌법은 제8장에 지방자치를 규정함으로써, 일본의 지방 제도가 중앙집권적 시스템을 탈피해 철저한 지방분권화를 도입하도록 했다. 이 헌법조문을 기초한 것은 틸톤(CecilG.Tilton)과 마컴, 키니 등이다. 지방자치를 통해 민주화를 지향했던것은 중앙집권적 전전의 행정제도를 개혁해 내무성 중심의 권력기구를 해체하는 것과 관련된다. 이리하여 헌법과 지방자치법 제정을 통해 주민에게 지사공선제(知事公選制), 지방의회 해산, 지사와 시정촌장 의원의 해직, 조례 제정에 대한 직접청구권 등을 부여하게 된 것이다. 일본의 지방자치는 국가의 지배로부터 독립해 정치하는 ‘단체자치’와 주민이 직접 정치에 참가해 행정의 민주적 운영을 도모하는 ‘주민자치’를 실현하는 것을 ‘지방자치의 근본취지’로 삼았다고 한다.

이에 대해 내무성은 GHQ의 지방분권화 정책에 정면으로 반발했고, 여러가지 방식으로 반발했다. 즉 부현관치론라든가, 부현은 지방자치로부터 천황의 정부를 지키는 방파제라는 논리에 입각해 지사공선론을 터부시했다. 또 헌법에서는 지방자치에 대한 대강만을 규정하고, 가능한 법률에 맡긴다는 식으로 국회에서 다수당이 자유롭게 ‘지방행정을 전횡’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기고자 했다. 즉 GHQ 원안에는 “국가헌법에 상당하는 헌장(charter)을 제정할 수 있는 권리를 지방자치체에 부여한다”고 돼 있었는데, 조문화할 때 이것을 ‘법률범위에서의 조례제정권’으로 바꿔 버렸다. 한국에서는 이런 규정을 모방했던 것인데, 결과적으로 일본 관료들이 천황제를 유지하려고 했던 의도까지 모방한 셈이어서, 오늘날 한국의 지방자치를 ‘국가의 법령의 범위안에서 ’한정하고 제약해 역주행하는 자치를 초래하게 된 것이다. 헌법개정에서 헌법수준의 헌장(charter)을 부여하는 도시자치권을 부여하는 제도를 신설해야 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오늘날 지방자치체가 주민운동의 성과로 중앙정부보다 높은 기준의 공해조례나 복지 등을 제시하더라도 국가 규제를 받게 돼 지방자치체의 자치권이 제약되게 된 것이다.

내무성 해체 GHQ는 일본의 민주화 개혁을 지속하면서 마지막으로 내무성 해체와 관료 제도 개혁을 단행했다. 이 개혁이 뒤로 미뤄진 것은 GHQ의 점령행정 자체가 일본의 내무성과 관료들의 손을 빌리지 않으면 안됐다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점령 초기의 민주화 개혁을 어느 정도 마친 GHQ는 1947년 5월 3일 헌법시행과 지방자치법 시행을 앞둔 4월 30일 휘트니 민정국장 명의로 ‘내무성 분권화에 관한 지령’을 발포했다.

내무성은 자신들의 전후 개혁에 대한 공헌도를 감안해 조직 개편에 머물것으로 보고 GHQ와 절충 했지만, GHQ 케이디스 차장과 스워프 중앙정부 담당과장은 해체 강행을 주장했고, 12월 31일 74년간 절대권력을 휘둘렀던 내무성은 해체됐다. 이것은 게슈타포나 게페우에 필적하는 일본 경찰의 암흑의 역사를 종결시키고, 일본 국민을 내무성 경찰권력으로부터 해방시켜서 세계여론을 만족시켜야 한다는 취지 였다(전게서,210).

공무원 제도 개혁 GHQ는 전전에 천황의 관리였던 관료들을 국민의 공복으로 바꾸는 개혁을 단행했다. 일본의 관료제는 천황제 권력을 지지하는 중요한 축(관료제, 군벌, 재벌, 정당, 지주제 등)이었다(민정국의 비슨). 또 일본의 관료들은 교활하고 시류에 민감하고, 전신과 보신술에 능수능란해 자주적 개혁이 어렵기에 철저한 외압에 의한 개혁이 필요하다고 봤다(TohnM.Maki).

또 일본의 관료제 개혁을 위해서는 근대적 민주정치에 부합하는 민주적 능률적 관료제가 필요하고, 근대적 인사 채용기술이 필요하다고 했다(Esman Memo). 후버 사절단도 중간보고에서 봉건적 관직 개념을 탈피해 전형의 공평과 임무 수행의 능률에 근거한 승급이 이뤄지도록 인사행정의 독립기관으로서의 인사원을 설치할 것을 권고했다. 이리하여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 중심, 봉건적 신분제도, 정실인사에 의한 승진 등을 특징으로 하던 전전의 관료제 개혁을 시도했다.

명치유신시대의 정촌

일본의 지방자치는 크게 4시기로 구분된다(니시오, 2002 : 67).

1868년 명치유신부터 1880년까지의 명치유신 시대, 1878년 3신법(新法) 및 1880년의 구(區) 정촌회(町村會)법에 의해 지방제도가 정비되고 운용되던 시대, 1888년 시제(市制) 정촌제(町村制), 1890년의 부현제(府縣制) 및 군제(郡制)가 제정돼 운용되던 시대로 전쟁전의 시기를 나누고, 전쟁후의 시기를 신헌법시대라고 한다. 즉 일본의 지방자치 제도는 크게 전쟁전의 3시기와 전쟁 후의 시기로 나눈다. 여기서는 먼저 전쟁 전의 명치유신 시대부터 살펴보자.

명치유신 시대는 막부(幕府)가 직할하던 지역은 막부직할지만 지배했고, 나머지 대부분의 지역은 번(藩)이 직접 지배했다. 이런 상태에서 명치유신의 신정부는 지방관인 부지사(府知事)나 현령(縣令)을 배치하게 된 것은 1869년의 판적봉환(版籍奉還)과 1871년의 폐번치현(廢藩置縣)의 조치로 인해서였다. 이때의 폐번치현으로 설치된 현 지역은 거의 옛날 번의 영지 그대로였기에 부현의 수는 3부 302현이었다. 그리고 새로 임명된 현령들도 옛날 번의 번주(藩主)였다.

한편, 정촌(町村)지역은 종래의 토옥, 명주(名主), 연기(年寄) 등의 촌장에게 맡겨뒀다. 그러면서 호적법을 제정하고, 1872년 호적 조사를 실시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 빠짐없이 구(區)를 설치하고, 이 구(區)에 호장(戶長), 부호장(副戶長)이라고 하는 국가 관료를 임명했다. 즉 자치의 공간에 관치가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다가 1872년 태정관포고(太政官布告)를 통해 구(區)를 대구로 개칭하고, 종래의 정촌 단위에 소구(小區)를 설치해 종래의 촌장에게 소구의 호장 부호장으로 개칭하고, 호적사무를 맡겼다. 이리하여 구(區)는 호적사무를 처리하던 특정목적의 행정구획에서 일반목적의 행정구획으로 바뀌게 됐다. 결과적으로 정촌의 지방자치가 국가의 지방행정과 융합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3신법 시대의 정촌

3신법은 1878년에 제정된 군구정촌(郡區町村)편제법, 부현회(府縣會) 규칙, 지방세(地方稅) 규칙을 의미한다. 그리고 1880년에 구정촌회(區町村會)법이 제정된 시대의 지방제도를 3신법의 시대라고 말한다. 여기서 지방 제도라고함은 국가의 지방행정 제도와 지역의 자치행정 제도를 통칭해서 말하는 것으로 국가와 지방의 관계를 구분해 살펴보는 것이 이 시대의 지방자치 제도를 이해하는데 필요하다.

즉 당시의 지방제도는 부현, 군구, 정촌의 3층제로 이뤄져 있었다. 여기서 군은 국가의 지방행정 구획이고, 구는 나중에 시(市)에 해당하는 것이고, 정촌은 종래의 정촌을 그대로 공인한 것이다. 그리하여 부현, 군구, 정촌은 국가의 행정기구임과 동시에 지방의 자치단체로 변화하게 된다.

이 당시에 정촌(町村)은 정촌회를 설치하도록 했고, 정촌회를 설치할지 여부는 부현의 판단에 맡겨져 있었다. 정촌의 장인호장(戶長)은 정촌회에서 선임했고, 가능하면 공선(公選)한 후에 부현지사가 임명하도록 했다. 공선의 방법은 임의의 방법으로 맡겨져 있었다. 이 부분을 보면, 당시에 천황에 의한 왕정의 정체(politeia)였는데도 지역의 마을 단위의 자치를 인정하고, 점차로 상향적으로 자치의 영역을 확장시켜 주는 방식을 취하고, 그 완결판으로서 일본 국회를 개설하는 제도설계의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 특이하다.

또 지방세 수입을 의정하는 기관으로서 부현회를 설치했다. 이 부현회에서는 지방세 징수방법이나 예산을 편성하는 권한을 가진 것으로서 군구를 선거구로 의원을 공선하도록 했다. 선거권자는 20세 이상의 남자로서 그 군구 내에 본적을 두고, 그 부현 내에 지세 5엔(円) 이상을 내는 자로 했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지방자치 제도로서 농촌부에 해당하는 군부(郡部)와 도시 지역에 해당하는 구부(區部)를 구분해 제도를 설계했다는 점이 특이하다. 즉 군부에는 정촌을 두고 정촌회의 호장을 공선하도록 했다.

명치헌법 시대의 시정촌

명치헌법 시대의 시정촌제도 설계는 풀뿌리부터 자치 제도를 설계하고, 상향적으로 자치계층을 형성하는 부분과 국가가 지방행정 제도로서 하향적으로 행정계층을 형성하는 부분을 결합하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즉 지방자치 제도는 1888년에 제정된 시정촌제가 풀뿌리 자치제도에 해당하는 것이고, 1890년의 부현제와 군제는 상향적 계층 형성을 통한 자치제로서 이해할 수 있다. 반면, 국가의 지방행정 제도로서의 지방관(地方官) 관제(官制)는 1886년에 칙령으로 제정된 것이다(니시오, 2002:73).

일본에서 지방자치 제도는 헌법 반포나 국회가 개설되기 이전에 제도설계를 했다는 점도 특이한 점이다. 즉 1881년 국회개설에 대한 칙유(勅諭)가 발표되고,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에 의해 헌법조사의 칙명을 수행하는 과정 중인 1884년 야마가타 아리또모(山縣有朋) 내무경이 내무성 내에 정촌법 조사위원을 설치했다. 그리고 이 정촌법 조사위원에게 지방제도의 전면적 재편성안에 대한 기초를 준비하게 했다.

즉 이 때 도입된 것이 독일인 알베르트 모세(A. Mosse)의 도움을 받아서 1888년의 시정촌제와 1890년 부현제 및 군제의 법률을 제정한 것이다. 그 내용을 보면, 군구역(당시 국가의 지방행정구획)에 지방자치단체인 군을 설치해 시와 병렬로 뒀다. 즉 3층제의 부현, 시군, 정촌의 계층이 형성됐고, 정촌은 군에만 뒀다. 부현은 내무성, 시군은 부현, 정촌은 군의 통제를 받는 계서제적 구조로 설계됐다.

다음으로 시와 정촌은 지방자치제도의 구획으로 했다. 즉 시정촌은 독립된 법인격을 가진 자치단체로 했다. 그리고 동시에 이들 시정촌을 국가의 지방행정구획으로도 삼아서 자치단체의 장을 국가의 기관으로 삼았다. 바로 이것이 일본의 ‘국가기관위임사무 제도’의 기원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부현과 군은 원래부터 국가의 지방 행정구획 혹은 지방행정기구로서 설치된 것이고, 그 장은 국가의 지방행정관청이었다. 다시 말해 군과 부현은 지방자치의 구획이거나 자치단체라고 법률에서 명시하지 않은 것이다. 즉 국가의 행정제도인 것이지 자치 제도는 아니었다.

농촌 지역 다음으로 풀뿌리의 지방자치 제도로서 정촌에는 정촌회를 두고, 정촌장을 선거하며 공선의원으로 구성하도록 하고 있다. 그리고 정촌회 의장으로 하여금 정촌장이 되도록 하고 있어 지방자치정부 구성에서 통합형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또 정촌회 선거는 공민(公民)에 한정했고, 25세의 독립한 남자로서 정촌 내에 지세나 직접국세로서 연액 2엔 이상을 바치는 자로 했다. 정촌회 의원 선거는 공민을 납세액의 다과에 따라서 2등급으로 구분해 각 급의 공민이 의원의 절반씩을 선거하는 2등급 선거였다.

정촌의 수는 명치초기에는 7만개 정도, 1888년 시제정촌제가 시행될 때 정촌합병으로 1만 4000개 정도로 삭감했다. 그러다가 패전당시에는 1만개 정도로 됐다. 농촌 지역 광역구에 해당하는 군에도 군회가 설치됐다. 그러나 군회는 정촌회 의원에 의한 간접 선거로 선출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었다. 즉 군회 의장은 관선의 郡長(郡守)이고, 군의 집행기관은 군참사회 였다. 즉 군은 온전한 자치단체라고 하기 어렵다.

도시 지역에서는 정촌회와 같이 시회가 설치됐고, 조례의 제정권이 부여되고, 개괄적인 수권이 이뤄졌다. 다만 시회의 의원선거는 공민을 3등급으로 구분한 3등급 선거 제도였다. 시장은 시회에서 추천한 3인 후보자중에서 내무대신이 천황에게 상주(上奏)해 재가를 받은 자로 했다. 온전한 자치권이 부여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도시 지역인 시에는 시참사회(市參事會)가 설치돼 시의 집행기관이 됐고, 시 참사회는 시회가 선임하는 조역(부시장) 1인과 명예직 참사회원 6명으로 구성했기에 정촌의 자치권보다도 자치가 제약되는 구조였다.

이에 더해 동경, 쿄토, 오사카와 같은 3대도시에는 그나마 시회도 구성되지 않았기에 자치 제도가 도입되지 않았던 셈이다. 즉 3대 도시에는 부지사(府知事)가 시장의 직무를 수행했고, 조역의 직무는 부(府)의 서기관이 하도록 특례가 정해져 있었다. 즉 3대 도시에는 자치권을 부여하지 않고, 천황과 국가의 통제를 받도록 하고 있는 셈이다.

한편, 시군(-정촌)의 경우는 상위구역에 부현회를 설치했다. 부현회의 선거는 군회 의원, 군참사 회원, 시회 의원, 시참사 회원에 의한 간선제로 바뀌었다. 부현에 참사회를 설치했지만, 부현에는 집행기관이 아닌 의결기관으로 했다(니시오,2002:71). 즉 부현의 집행기관은 내무성이 임명한 독임제의 지사고, 부현지사와 부현의장은 다른 사람이어서 겸임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명치 시대의 지방 제도에서 정촌의 자치 제도는 강화하면서, 부현에 대해서는 오히려 관치단체로서의 성격이 더 강하게 됐다. 그리고 군제나 등급간선제, 간선제, 참사회제 등은 독일의 제도를 따른 것이고, 집권융합형의 종합행정기관으로서의 특징도 갖고 있었다.

일본의 지방 제도는 1898년을 계기로 자치 제도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개혁이 진행됐다. 즉 1898년에 3대 도시에 대한 특례를 폐지해 도쿄, 쿄토, 오사카의 3개 도시에 시장과 조역을 뒀고, 시회에서 추천하는 3인중에서 내무대신이 선임하고 재가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1899년에는 군제와 부현제가 개정돼 군회 의원과 부현회 의원의 간선제를 폐지하고, 직선제로 바뀌었다. 또 1911년에는 시제 정촌제를 개정해 시제와 정촌제로 독립된 법제로 분리했고, 시참사회를 집행기관에서 의결기관으로 바뀌었다. 1921년에는 시제가 개정돼 시회 의원 선거가 3등급 선거에서 2등급 선거로 바뀌었고, 정촌제의 개정을 통해서 정촌회 의원 선거를 2등급제에서 평등선거제로 바꿨다.

1923년에는 군제가 폐지돼 군은 지방단체로서의 성격을 잃었고, 군장과 군청으로 이뤄진 국가의 지방행정기구로 바뀌었다. 또 1926년에는 군장과 군청도 폐지돼 군은 국가의 지방행정구획으로서의 지위를 잃어 단순한 지리적인 명칭에 지나지 않게 됐다. 소화 시대에 들어가는 1926년에는 도시 지역의 시장도 시회에서 선출하는 것으로 바뀌어 내무대신에 의한 선임과 재가는 폐지됐다. 즉 자치적으로 변환된 것이다. 1929년에는 부현제가 개정돼 부현에도 시정촌과 같이 조례 및 규칙을 제정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됐다.

일본의 지방자치 제도는 전시에 들어가는 1943년에 시장의 선출을 시회의 추천에 의하고, 내무대신이 선임하는 방식으로 바뀌었고, 정촌장은 정촌회의 선출에 의하지만, 인가하는 방식으로 바뀌어 관치화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즉 자치의 관점에서는 역주행이다. 이때 동경 시(東京市)와 동경부(東京府)를 폐지하고, 동경도(東京都)를 창설했다.

전후개혁과 지방자치보장

신헌법 시대 일본 패전 이후 GHQ개혁의 핵심은 일본국 헌법을 제정하는 것이었고, 여기에서 제8장에 지방자치의 제도 보장조항을 뒀다. 풀뿌리자치 제도에 해당하는 시정촌회에 의한 간접 선거에서 주민 직선에 의한 직접 선거로 바뀌었다. 주민주권성을 강화한 것이다. 다음으로 도도부현의 경우에도 내무성에 의한 관선에서 주민에 의한 직접 선거로 바꿨고, 도도부현의 직원도 원칙적으로 지방공무원으로 전환됐다. 이로 인해 도도부현은 완전 자치단체로 전환됐다.

또 지방자치단체의 조직과 운영에 대한 사항을 지방자치법으로 획일화했다. 즉 종전의 시제, 정촌제, 부현제 처럼 단체별로 별도로 정하지 않게 됐다. 다음으로 내무성을 해체했다. 즉 내무성이 해체돼 전후에는 후생성, 노동성, 건설성, 자치성, 국가공안위원회와 경찰청 등으로 횡적 분할체제로 전환됐다.

여기서 국가경찰을 해체 재편해 시정촌 소관의 자치단체 경찰을 기본으로 하는 자치경찰 제도를 도입했다. 또 교육 분야에서도 시정촌교육위원회를 두고, 주민 직선의 위원으로 구성하도록 해 교육자치도 도입했다.

이 시기에 지방자치가 외관상으로는 혁신적으로 도입된 것으로 보이나 실제로는 오히려 관치적 구조가 심화된 측면도 있다. 즉 전전에 시정촌 레벨에만 적용됐던 기관위임사무 제도가 전후에는 도도부현 레벨까지 확대 적용돼 도도부현의 지사나 시정촌장, 그리고 도도부현과 시정촌의 집행기관을 모두 국가의 기관으로 삼는 국가기관위임사무 제도라는 시스템을 확대 적용한 것이다. 이것은 관치제도가 오히려 확대된 셈이다.

또 도도부현과 시정촌 사이의 계서제 구조를 남겨두고 있어, 결과적으로 국가와 시정촌 사이의 정보 전달에서 도도부현을 경유하도록 해 외관적 자치 제도는 도입됐지만, 내적으로는 오히려 관치를 심화시키는 묘한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1949년에 일본에 온 미국의 샤우프 세제개혁 사절단장은 샤우프 리포트에서 시정촌 우선의 원칙을 제시해 풀뿌리 지방자치를 강조했다. 이로 인해 일본에서는 시정촌과 도도부현이 사사건건 대립 항쟁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시정촌 계층에서 도입됐던 교육자치로서의 교육위원회 위원의 직선제가 폐지됐고, 의무교육 학교의 교원 임용사무를 도도부현으로 이관해 도도부현의 권한이 강화됐다. 또 시정촌 계층에 도입됐던 자치경찰도 폐지돼 도도부현 경찰의 창설로 인해 도도부현의 권한이 복권됐다. 1956년에는 지방자치법 개정이 이뤄져, 도도부현과 시정촌의 관계가 상하관계로 됐다. 이 때 특별시 제도는 폐지되고, 정령지정시제도가 창설됐다.

도도부현과 시정촌의 세원에 대한 자치권을 확보하기 위해 샤우프는 독립세의 창설과 세원의 분리를 주장했다. 그리고 부족 재원을 보충하기 위해 지방평형교부금제도를 제안해 1954년 부터는 국세 3세(소득세, 법인세, 주세)의 일정비율(교부세율)을 자치단체에 배분하도록 했다. 그 비율이 당초 22%에서 27.5%로 까지 인상돼 지방자치단체의 재정궁핍 상태가 개선됐다. 그러나 지방평형교부세 제도가 폐지되고, 샤우프 세제도 재검토돼 도도부현세와 시정촌세의 분리가 무너지고, 쌍방이 모두 주민의 소득에 과세하는 주민세(시정촌민세, 도도부현민세)와 소비세를 세원으로 해 같은 대상에 경합해 과세하게 됐다.

그리하여 세원들 간에 서로 연동하게 돼 재정 조정에 의한 공평성을 확보한다는 이유로 독립세인 시정촌세인 고정자산세에 대해서도 표준세율을 정하게 됐다. 이는 결과적으로 지방세제가 국가의 엄격한 통제를 받는 결과를 초래했다. 결과적으로 일본의 지방자치에서 세입의 자치는 거의 없게 됐고, 세출의 자치에만 전념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됐다. 융합형의 자치는 결과적으로 집권형의 지방행정으로 나타난 셈이다.

기관위임 사무제도의 확대

전후 일본에서 기관위임 사무제도가 확대되고, 보조금 행정이 급팽창하게 되며, 통달 행정이 심화되게 된 것은, 내무성의 해체로 인해, 각 성청이 지방파출기관과 특수법인, 부속시설 등을 남설 했던 것과 관련된다. 즉 전전과 같이 도도부현이 중앙정부의 종합파출기관이었던 때는 중앙의 각 성청이 지방지분부국(地方支分部局, 지방파출기관)을 설치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전후 도도부현이 완전 자치단체가 되면서 각 성청은 직접 지방파출기관을 신설하고, 증설했던 것이다. 이런 현상은 복지국가로의 전환과정에서 선진국 어느 나라에서나 나타나는 것이 었지만, 일본에서도 신중앙집권 이라고 불리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일본의 지방 제도에서 신중앙 집권화와 함께 종적 행정의 분립 현상이 강화돼 지방자치단체들은 지역 종합 행정이 어려워지게 됐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개혁안이 등장하게 됐다. 이 중에는 1956년에 제2차 행정심의회 답신을 통해 내무성설치법안(건설성과 자치청, 경제기획청의 일부를 통합하는 안)이 있었다. 이 법안은 건설성의 저항으로 성립하지 못했다. 1959년에는 제4차 행정심의회가 제안한 자치성 설치 구상이 등장했는데, 이것은 자치청 에도가 국가소방본부, 북해도개발청, 총리부 특별지역연락국, 수도권정비위원회, 건설성의 일부, 경제기획청의 일부를 통합하는 안이었다. 이것도 실현되지 못하고, 결국 1960년에 자치청과 국가소방본부가 통합해 자치성이 설치되는 선에서 마무리됐다. 이리하여 내무성의 부활은 종지부를 찍었다.

한편, 종적행정에 대한 분립경향에 대한 대안으로 도주제(道州制)구상을 들 수 있다. 1957년 제4차 지방제도조사회가 도주제안과 부현통합안의 양안을 병기한 답신을 제출했다. 이 구상의 제도설계자들의 의도는 직선 지사 제도를 폐지하고, 국가의 종합파출기관을 부활시키려 한 것이라고 한다(니시오, 2002 : 82), 즉 지방 제도상에 각 성청의 종적 행정의 폐해를 조정하고 내정을 총괄하려고 한 의도가 깔려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구상은 직선 지사들이 거세게 반대했고, 종적행정분립으로 인해 기득권을 얻고 있는 각 성청이 일제히 반대해 도주제의 구상은 물거품이 됐다.

주민자치의 후퇴

GHQ에 의한 분권화정책의 대표적인 것은 제2차 지방자치제도 개혁과 경찰법의 제정에 의한 자치체 경찰의 설치(1948년), 그리고 교육위원회법 제정에 의한 도도부현, 시구정촌교육위원회의 설치와 교육위원의 공선제를 들 수 있다. 전후 개혁에 의해 지방정부는 새로운 권한 확대와 책임을 통해 미국의 지방정부의 전통적 기능이었던 경찰과 의무교육의 책무가 부여됐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미국식의 ‘민주적 지방자치 분권화 정책’도 점차 철회돼버린 것이다.

GHQ는 민주화정책의 일환으로서 지방분권화 추진 외에도 노동조합의 결성을 장려하는 노동정책, 재벌 해체 등의 산업정책, 농지 개혁 등의 토지정책 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했지만, 1948년 미국 육군 장관에 의한 점령정책 전환의 성명이 발표되고, 점차로 민주화정책의 궤도 수정이 시도됐다.

즉 1945년에 한국이 남북으로 분열됐고, 1948년 9월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고, 1949년에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는 등 국제정세가 요동했다. 특히 1950년엔 한국전쟁이 발발해 긴장된 아시아 정세가 전개됐다. 이런 와중에 미국과 소련의 대립이 진전됐고, 미국으로서도 공산주의와 전체주의의 범람에 대한 경계에서 일본을 경제적으로 자립시키는 자유주의국가로서 육성하고, 아사아에 있어서 전체주의 방파제로 하는 점령정책으로 전환하지 않을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그래서 GHQ에 의해 경찰분권과 교육분권과 같은 획기적인 지방분권이 진전됐음에도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점령정책도 전환해, 일본경제를 재건시키고 부흥시키는 정책으로 전환함에 따라 민주화 정책 개혁은 중단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즉 다시 집권화 방향으로 역전하게 됐고, 전전의 제도로의 회귀가 일어나게 됐다. 이를 역코스라고 하는데, 대표적인 것이 자치체경찰과 교육위원의 공선제 등 민주적 지방분권화 정책을 폐지하게된 것이다.

자치체경찰은 일방적인 폐지를 한 것은 아니고, 보스 지배라든가 자치체의 경비부담이 증대되고 압박된다는 등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1951년에 경찰법이 개정됐고, 시정촌이 주민투표에 의해 자치체경찰을 폐지하도록 개정됐다. 그리하여 1600개에 이르던 자치체경찰이 주민투표에 의해 폐지결정을 하게 됐고, 400개 정도로 급감했다.

또 전후 개혁의 일환으로 도입된 직접청구제도였던 조례제정 개폐청구의 대상에서 지방세의 부과징수 등 분담금이나 사용료, 수수료의 징수에 관한 조례가 1948년 지방자치법 개정에 의해 제외된 것도 역코스의 사례다. 결과적으로 분권화와 민주화 개혁에 역행하는 일련의 조치에 의해 주민자치도 실질적으로 후퇴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사태가 벌어지게 된것이다.

결론 및 시사점

일본에 대한 GHQ의 민주화 개혁과 분권화정책은 점령관리 개혁이라고 하는 강력한 권력적 기반을 갖고 추진된 것이다. 즉 GHQ위상은 천황과 일본 정부를 종적으로 지휘 명령할 수 있는 권능을 가졌다. 이런 위상을 갖고 진행된 민주화 개혁과 자치분권화 정책도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 실패했다. 이 점에서 한국의 자치분권정책의 길은 참으로 요원할 수밖에 없고, 주민자치의 실질화도 어렵기 그지없는 정책인 것은 분명하다. 2018년의 자치분권 개헌이 시도 됐더라면 그래도 일말의 희망을 가질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자치분권 개혁은 극히 어려운 난제였을 것으로 예상됐던 것인데, 자치분권 개헌마저 물 건너간 상태에서 한국의 지방자치의 선진화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것이 아닌가 한다.

본고를 통해 전전의 일본의 지방자치와 주민자치에 대한 제도설계의 과정을 엿볼 수 있는 성과를 얻게 됐다. 매우 인상적인 것 중에 하나는 시정촌 단위의 풀뿌리 지역 사회부터 상향적으로 진행되는 제도설계와 국가로부터 하향적으로 관리통제시스템을 구축하는 제도설계를 구분했고, 이것이 연결되는 공간이 도도부현과 군계층이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도시 지역과 농촌 지역에 대한 제도설계를 다르게 했다는 점도 매우 인상적이다. 그리고 풀뿌리 자치 계층으로서 시와 정촌을 봤고, 정촌의 경우에는 명치 초기에는 7만개, 패전시에도 1만개에 이를 정도로 매우 작은 규모였다. 그리고 이들 정촌회를 선거로 선출했다는 점도 매우 인상적이다. 한국은 최근까지도 읍·면·동에 공선을 통한 주민 의원을 선출하자는 발상을 하고 있지 못한 점은 한국의 지방 제도에 구조적인 제약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전반적으로 일본의 주민자치에 대한 전전 국가의 관점은 가능한 자치를 지연시키려 했고, 특히 대도시 지역에 대해서는 자치권을 허용하지 않고, 국가가 직접 관리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또 도부부현에 대해서는 국가 중앙정부의 방패막이로서 관치를 유지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일본의 제도적 유습이 한국의 지방제도에도 그대로 벤치마킹 돼, 한국의 자치분권 개혁을 진전시켜 나가는데 이런 숨겨진 장치들의 저항을 극복하기 위한 전략 개발 없이는 주민자치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것이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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